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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이렇게 혼자 있던 적이 없었다...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리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스스로가 놀랍다는 생각도 한참 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도. 행성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40년간 개척지 행성에서 일을 하며 살아온 오필리아는 이곳에 남편과 아이들을 묻었다.
하나 남은 아들과 며느리와 살아가던 오필리아.
어느 날 콜로니는 이 행성을 비우기로 한다. 모두 떠나야 했다.
오필리아는 아들 내외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 셔틀을 타기로 했지만 대신 숲으로 간다.
모두가 행성을 떠난 이후 숲에서 나온 오필리아는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사람의 말소리 하나 없는 이 행성의 주인은 이제 오필리아뿐이다.
온전히 혼자가 된 오필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다 나도 같이 홀가분함을 느꼈다.
문득 외로우면 어쩌지? 혼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라는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필리아는 정말 잘 지냈다.
개척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헛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남의 집이었던 곳을 드나들며 짜릿함과 동시에 죄짓는 느낌을 받는 오필리아.
오래도록 그녀의 생각을 지배했던 목소리는 끝없이 그녀를 꾸짖고 방해하지만 내면에 새로이 생긴 목소리는 '괜찮다'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70대 할머니 오필리아는 아무런 잔소리도, 참견도, 눈초리도 없는 이 세상에서 70년 만의 자유를 맘껏 누린다.
어느 날 이곳에 새로운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필리아의 일상은 평화와 자유 그 자체였다.
괴동물은 직립보행을 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4개였다.
몸짓으로 서로를 탐색해 가는 시간.
두려움 대신 용기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이들의 소통이 앞으로 인류가 마주할 수 있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랙의 다양한 우주적 캐릭터들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고 싶어 하면 안 돼. 그들로부터 인간의 기술을 보호해야 해. 인간의 기술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하기도 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괴동물들.
그녀를 처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생명체를 만났고, 그녀를 처음으로 존중해 주는 생명체를 만났지만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경계심이 생긴다. 하지만 뭐, 어때? 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들의 평화로운 소통을 방해한 건 뒤늦게 행성을 조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지식으로 무장했지만 지혜는 없었다.
오필리아가 괴동물들과 소통한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고 그들의 지능이 높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외계인이에요." 리키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은 아무것도 못해요. 배운 것 없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흔한 할머니잖아요."
이 사람들이 괴동물들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그를 이해하는 일에 괴동물들보다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아요."
오필리아는 이미 괴동물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인간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겨진 시설을 폐기하고 오필리아까지 데리고 가려고 한다.
오필리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갈까?
내가 오필리아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70 넘은 나이에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거추장스러운 느낌을 받는다면 나 역시 혼자라도 행성에 남았을까?
오필리아는 대담한 여성이다. 평생 동안 그 모습을 숨기고 살았지만..
노인은 사회적 가치로 봤을 때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가진 것이 많던 가진 것이 적던.
그들이 살아온 세월에서 축척한 삶의 기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젊음 앞에서.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은 언제나 버려진 카드였다.
그러나 그가 속한 팀은 예상을 깨고 살아남는다. 그가 가진 삶의 지혜가 그들을 살린다.
노인이란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깊이를 담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오필리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잔류 인구라는 제목과 70대 할머니의 생존기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했다.
새로운 종과의 만남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필요로 하고, 그것은 결국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에 선택지를 갖게 된다면 그건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 행성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괴동물들은 그녀의 선택지를 지킬 수 있게 했다.
이 새로운 이야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대할 때 어때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오필리아와 괴동물들의 소통은 우리 삶의 모든 인간관계가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서로를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존중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잔류 인구는 오필리아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소설이 될 거 같다.
오필리아가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같지만 어디에나 있는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엄마가 바로 오필리아이고 나도 곧 오필리아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