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결함 3
이치은 지음 / 픽션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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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들은 꼭 누가 시켜서 내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 생각하죠?

마트 시식 코너에서 일하는 로봇 마리 8.

얼마 전부터 고객들의 항의가 들어온다.

마트를 다녀오면 배탈이 난다고.

마트에선 고심 끝에 로봇의 결함을 신고한다.

그리고 나는 손님인척 마트 시식코너의 마리 8을 찾아간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에게 저런 메일이 도착했다.

포커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속여야 하고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동아시아 세계 챔피언인 로봇 민수.

세계 대회를 앞두고 번번이 어느 순간이 되면 무너지는 민수.

로봇도 슬럼프를 겪을까?

카드를 잡지 않은 왼쪽 손목에 작은 경련 같은 것들이 보이더라구요. 민수가 나쁜 패를 가지고 블러핑할 때마다요.

포커판에서 포커페이스가 안되는 로봇 선수라니!

인간과 우울증에 대해 논의하는 로봇 해터.

로봇이 인간을 배신할 수 있을까? 토로욧은 기밀을 누설했을까?

시를 가르치는 로봇 홀리오의 시들엔 왜 그렇게 토끼가 나오는 걸까?

읽는 동안 로봇에게서 인정을 느낀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로봇.

로봇 보다 더 로봇같이 생각하는 나.

읽으면 읽을수록 오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로봇의 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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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결함 2
이치은 지음 / 픽션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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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아로프는 할머니에게 매번 진다.

단계를 높여도 할머니에게 매번 지는 아로프.

하지만 '나'에게는 간단하게 이겨버리는 아로프.

아로프가 할머니에게 지는 이유가 뭘까?

턴테이블의 회전수를 측정하는 로봇 엠마는 왜 자살했을까?

배우를 닮은 경찰 로봇 포그는 어째서 일 년에 며칠은 잠수를 타는 걸까?

성당의 복사를 하고 싶었던 로봇 바심

3D 프린트로 종달새만 복사하듯 만들던 종달새 53호가 나에게 만들어 준 것은?

이 각각의 로봇의 이름엔 우리가 알면 놀랄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치은 작가는 이 아주 짧은 이야기에 아주 심오한 치장을 해놨다.

읽으면서 작가의 영리함과 기발함에 감탄을 했다.

로봇 이름에 담긴 사연(?)을 알고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이야기를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자극되었다면 그 이야기는 성공한 이야기다.

2020년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배웠고

인간은 거리 두기만큼의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의 바쁜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만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달라지는 세상 앞에서 인간으로 남을 건지 다시 로봇화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절이다.

이 로봇의 결함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이런 거 같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라.

그동안 인간은 기계처럼 살았다.

바쁜 현대사회에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으니까.

로봇의 결함은

인간의 결함과도 같다.

로봇을 빙자한 인간의 결함을 이치은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해답이 없다.

그 해답은 이제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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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결함 1
이치은 지음 / 픽션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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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은 작가의 글은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지척에 있는 거 같으면서도 아득하다.

이 로봇의 결함도 그렇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로봇과 함께 생활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만 책을 덮고 나면 현실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근 미래.

로봇의 결함에 대해 신고가 들어오면 그것을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 '나'

아무도 없을 때 '욕'을 하는 인명 구조 로봇 조라

살벌한 동화를 얘기하는 동화 구연 로봇 바셀미

꽃을 따는 로봇 롱공

이름 짓는 로봇 옵스트

물류 센터 로봇 양생

그리고 '나'의 꿈.

1편에 담긴 이야기들은 짧은 단편들이다.

결함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조사를 하러 현장을 방문하는 나.

그곳에서 발견되는 로봇들의 결함은 점점이 우리와 닮아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욕을 하는 로봇 조라. 무엇이 조라를 그리도 힘들게 했을까?

발가락에 마비가 와서 꽃을 따는 속도가 느려진 롱공

아이에게 살벌한 동화를 들려주는 바셀미

동물원에서 태어나는 새끼에게 과일 이름을 지어주는 옵스트

꿈을 꾸는 양생

이들은 모두 로봇이지만 로봇화된 인간을 상징한다.

아니면 로봇 취급을 받는 인간이거나.

욕을 해서도 안되고, 꿈을 꾸어도 안되고, 몸에 마비를 느껴도 안되고, 창의적인 이름을 지어서도 안되는 로봇.

하지만 그 로봇들은 인간이 모르게 무언가를 느낀다. 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집같이 짧고 간결한 단편을 읽으며 나는 이유 모를 슬픔을 느꼈다.

아프고, 아리고,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로봇에게서 느껴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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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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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아름답고 재능 있는 젊은 화가에게 평론가는 그녀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한 마디 사족을 덧붙였다.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칭찬을 하고 나서 평론가로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었겠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었던 그 한마디. 깊이가 없다.는 화가의 가슴에 내리 꽂혔다.

깊이를 찾기 위해, 깊이의 바닥을 보기 위해, 깊이를 알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피폐해져가는 그녀.

깊이란 늪과 같아서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점점 삼켜 버렸다.

평론가의 말에 휘둘려 버린 재능 있는 화가는 죽은 뒤에도 평론가의 평을 받아야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르면서 떠벌리는 그 입.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입. 다물라!!!"

그녀 안에 기준이 있었다면 평론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안에 배려가 있었다면 자신의 말을 멋스럽게 보이게 할 사족은 달지 않았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속 쓰리는 깊이에의 강요다.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비주얼로는 천재에 맞먹는 매력적인 젊은이가 상대적으로 후줄근하고 별 볼일 없는 체스 장인에게 도전한다.

그 모습 자체가 젊음과 노년의 대결처럼 보였다.

읽는 내내 패기롭게 수를 두는 청년과 그 앞에서 쩔쩔매는 고수의 모습에 통쾌해 하는 구경꾼들을 보며

젊음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틀려도, 실수를 해도, 엉뚱해도,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해도 이해받고, 응원받고, 격려 받는다고 생각했다.

체스 장인도, 구경꾼들도 화려한 겉 멋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재도 아니고, 체스를 잘 두는 사람도 아니고, 기본을 아는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체스 장인까지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쫄았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비굴해지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그와 대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릴 뿐이지.

고수가 하수도 아닌 사람 앞에서 정성껏 수를 두는 모습도

둘러서서 자신이 갖지 못한 과감함을 응원하며 그를 영웅 취급하던 구경꾼들도

읽으면서 조마조마했던 나조차도 다 웃음거리가 되는 이야기 승부.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독서쟁이들이라면 이 단편 앞에서 무릎을 칠 테지.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고, 분명 읽었는데 까맣게 기억이 태워져 버리고,

내용은 생각나는데 제목이나 작가가 생각이 안 나고

제목과 작가가 생각나면 내용이 까마득하고.

읽은 거 같은데 들여다보면 첨 읽는 책 같고

그렇게 읽다 보면 언젠가 읽은 책이고

분명 읽었는데 뒤돌아 보면 뭔 얘긴지 오리무중인 이 사태!

문학의 건망증은 뭐랄까 나 자신과 더불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큭큭 거리며 읽은 단편이다.

의미만 뇌리에 남으면 되는 것이지. 암만!

4편의 단편이 담긴 깊이에의 강요.

그중 장인 뮈사르의 유언만 예나 지금이나 쉬이 해석되지 않는다.

아직 쥐스킨트화 되지 못해서 내공이 딸리는 까닭이다.

은둔 작가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그의 단편들은 모두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읽다 보면 별거가 되어 버린다.

간단. 명료. 깊이.

내게 쥐스킨트는 이렇게 각인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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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 어떻게 인생의 중심을 지킬 것인가
이진우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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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삶을 성찰하고, 삶으로 철학을 살았던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 철학에서 찾아낸 균형이라는 불멸의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 하면 괜히 어려운 느낌이 들고, 나랑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엔 철학이 필요하다.

그 철학을 잃었을 때, 그 철학을 무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문제는 그것을 잃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철학 없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중요한 것들을 방치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생을 살게 된다.

그러고 싶은가?

자기만의 "왜"가 있는가?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왜? 질문이자 호기심이자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나만의 "왜" 가 있다면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휘둘리지 않으면 균형을 잡을 확률이 더 커진다.

삶의 목적을 가질 때만 매 순간 부딪치는 문제들을 목적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목적이 있어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기에 삶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균형의 예술'이다.

저자는 그리스 철학에서 균형을 찾는다.

균형은 곧 중용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인간종에겐 한가하게 철학을 논할 시간이 없다.

풍족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풍족해질수록 여유는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

목적을 잃은 바쁨은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병들게 했다.

요즘 들어서 나만의 기준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뭔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재단하고 싶었다.

양쪽의 이야기보다는 내 구미에 맞는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면서 뭔가 나도 한쪽으로 쏠리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취미인 독서도 편독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양하게 읽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이 책에서 나는 내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읽었다.

개인적 어른을 떠나 사회적 어른이 되어가면서 균형을 잃으면 모두에게 민폐가 되는 어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삐딱하게 몰려가는 세상에서 나라도 균형점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처럼 길을 잃고 답답한 어른들이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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