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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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아름답고 재능 있는 젊은 화가에게 평론가는 그녀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한 마디 사족을 덧붙였다.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칭찬을 하고 나서 평론가로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었겠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었던 그 한마디. 깊이가 없다.는 화가의 가슴에 내리 꽂혔다.

깊이를 찾기 위해, 깊이의 바닥을 보기 위해, 깊이를 알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피폐해져가는 그녀.

깊이란 늪과 같아서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점점 삼켜 버렸다.

평론가의 말에 휘둘려 버린 재능 있는 화가는 죽은 뒤에도 평론가의 평을 받아야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르면서 떠벌리는 그 입.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입. 다물라!!!"

그녀 안에 기준이 있었다면 평론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안에 배려가 있었다면 자신의 말을 멋스럽게 보이게 할 사족은 달지 않았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속 쓰리는 깊이에의 강요다.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비주얼로는 천재에 맞먹는 매력적인 젊은이가 상대적으로 후줄근하고 별 볼일 없는 체스 장인에게 도전한다.

그 모습 자체가 젊음과 노년의 대결처럼 보였다.

읽는 내내 패기롭게 수를 두는 청년과 그 앞에서 쩔쩔매는 고수의 모습에 통쾌해 하는 구경꾼들을 보며

젊음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틀려도, 실수를 해도, 엉뚱해도,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해도 이해받고, 응원받고, 격려 받는다고 생각했다.

체스 장인도, 구경꾼들도 화려한 겉 멋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재도 아니고, 체스를 잘 두는 사람도 아니고, 기본을 아는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체스 장인까지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쫄았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비굴해지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그와 대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릴 뿐이지.

고수가 하수도 아닌 사람 앞에서 정성껏 수를 두는 모습도

둘러서서 자신이 갖지 못한 과감함을 응원하며 그를 영웅 취급하던 구경꾼들도

읽으면서 조마조마했던 나조차도 다 웃음거리가 되는 이야기 승부.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독서쟁이들이라면 이 단편 앞에서 무릎을 칠 테지.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고, 분명 읽었는데 까맣게 기억이 태워져 버리고,

내용은 생각나는데 제목이나 작가가 생각이 안 나고

제목과 작가가 생각나면 내용이 까마득하고.

읽은 거 같은데 들여다보면 첨 읽는 책 같고

그렇게 읽다 보면 언젠가 읽은 책이고

분명 읽었는데 뒤돌아 보면 뭔 얘긴지 오리무중인 이 사태!

문학의 건망증은 뭐랄까 나 자신과 더불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큭큭 거리며 읽은 단편이다.

의미만 뇌리에 남으면 되는 것이지. 암만!

4편의 단편이 담긴 깊이에의 강요.

그중 장인 뮈사르의 유언만 예나 지금이나 쉬이 해석되지 않는다.

아직 쥐스킨트화 되지 못해서 내공이 딸리는 까닭이다.

은둔 작가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그의 단편들은 모두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읽다 보면 별거가 되어 버린다.

간단. 명료. 깊이.

내게 쥐스킨트는 이렇게 각인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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