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류 속의 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동훈 옮김 / 고유명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린 그리 잘해 내지는 못했군. 그렇지 않은가?

 

 

 

이 문장이 <해류 속의 섬들>을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관통하는 문장인 거 같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의미로 다가올 문장이 아닐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들이 그려내는 배경과 상황과 인물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작품이었다.

느리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면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자극적이지 않은데 자극적이고, 격렬하지 않은데 격렬하다.

처절하지 않은 표현 뒤로 처절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느끼지 못할 만큼의 상실감이 마치 후광처럼 토머스 허드슨의 머리를 물들인다.

 

황새치 잡이 6시간의 사투는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킨다.

어른 보다 더한 집중력으로 싸웠던 데이비드,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허드슨은 그 찰나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다.

첫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톰과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데이비드와 앤드루.

이 세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허드슨은 그들이 떠나고 남을 자신의 공허함을 걱정한다.

이 아름답고 뜨거웠던 한때는 마치 <운수 좋은 날>처럼 그의 인생에 커다란 낙인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행복했던 시절만큼이나 처참했으니까...

 

 

"무언가에 부딪혔거나 무언가가 와서 부딪쳤겠지."

 

 

인생은 언제 무언가가 와서 부딪혔거나 부딪칠지 알 수 없다.

모든 행복한 한때, 그리고 특별히 더 행복한 한 때는 그다음에 올 상실의 고통을 위해 준비된 것일 뿐...

 

"슬픔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슬픔을 술로 둔감화 시키려던 그 마음.

그림도 그릴 수 없는 그 마음.

고양이에게 위로를 받는 그 마음.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이 그래서 더 외롭고 슬픈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세상은 전쟁 중이고 허드슨은 바다로 나간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내내 그의 곁에 머물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거 같다.

그 죽음이 자살일지 사고일지 그냥 일어나는 일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그는 바다에 있었으니까...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무턱대고 읽었다면 허드슨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까?

읽는 내내 헤밍웨이와 허드슨을 동일시해서인지 작품을 온전히 그대로 읽은 게 아닌 기분이 든다.

 

헤밍웨이 자신이 전쟁 속에 잃었던 것들을 허드슨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 의미를 느껴보게 만든 거 같다.

허드슨의 공허함과 상실의 고통은 독자로 하여금 그 고통의 수위를 가늠하게 한다.

그것은 곧 헤밍웨이 자신의 고통과도 같다.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살아났어도 살아있지 못하게 하는 괴물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스스로를 거둔 것도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망망대해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그도 쓰는 내내 그러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마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판 <속죄>!?

 

 

유명한 작가일수록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이 의외의 작품일 수 있다.

나에게 나쓰메 소세키는 산문으로 먼저 다가왔다. 그의 장편을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때마침 독파에서 <마음>이 올라와 있었다. 이참에 소세키 입문으로 좋을 거 같아서 참가했다.

그러니 내게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은 <마음>이 처음이다.

 

<마음>은 전자책으로 읽었다.

밀리의 서재에 있는 문학동네 버전과 리디 셀렉트에 있는 열린책들 버전을 번갈아 읽었다.

번역자에 따라 다른 번역을 보는 재미를 동시에 얻은 책이다.

 

별다른 사건이 없지만 계속 읽게 되는 힘이 있는 소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세키의 필력이 아닐까?

 

이야기에 나오는 선생님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자 주인공 '나'에게 어른으로서 마음의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우연히 만났지만 계속 관계를 유지해가는 모습이 내겐 신기했다. 저렇게 만나서 계속 친분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었다.

 

이 선생님에겐 비밀이 있는 거 같다.

혼자 조용히 다녀오는 묘지.

그곳에 묻힌 이가 누구인지 선생은 말이 없다.

'나'는 혼자 상상해 보지만 좀체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렇게 이어가는 인연 중에 '나'는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선생님의 비장한(?)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에는 '나'가 궁금해하던 선생님의 '비밀'이 담겨있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나'는 도쿄의 선생님한테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선생님이 보낸 편지에 담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이 미스터리한 부분 때문에 초반에 선생님의 과거를 엄청나게 오해(?) 해 버린 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지만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느라 <마음>은 추리소설이 되어 버렸다!

 

내 과거가 나를 압박한 결과, 이런 모순된 인간으로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상처받았으므로 자기합리화를 해버린 선생님.

그가 죗값을 치르고 살았다고 하는 그 마음조차도 어쩜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젊은 나이에는 누구나 선생님 같은 마음으로 살 때가 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하고, 눈치 보며 혼자 상상하고, 별거 아닌 것도 크게 만들어 내어 속앓이를 하는...

차라리 K처럼 담백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되뇌어진다...

 

<마음>을 읽으며 젊은 선생님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느낌들을 내 마음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상처란 그렇게 집요하게 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해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생님이 어린 나이에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더라면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을까?

 

알 수 없는 꼬리표만 남기고 <마음>은 끝났다.

도쿄행 열차 안에서 '나'는 어떤 마음일까?

선생님의 편지가 '나'에게 또 다른 상처로 '독'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법 엄숙한 얼굴 소설, 잇다 2
지하련.임솔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동시대를 사는 느낌

 

 

학교를 마치던 해 정희와 도망갈 약속을 어기던 일, 별로 마음이 내키지도 않는 것을 어머니가 몇 번 타이른다고 그냥 시집갈 궁리를 하던 일, 생각하면 아무리 제가 한 일이래도 모두 지랄 같다.

 

 

지하련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그의 글도 처음 읽었다.

1912년 생인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라고 나름 상상해 봤는데 시대적 복잡함 속에서 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의식은 여전함으로 이어져왔다.

 

<결별>의 형예는 나이 많은 남편과 결혼해 살고 있다.

분가를 해서 시집살이를 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자꾸 속이 시끄럽다.

서울 남자랑 결혼한 정희.

반갑게 맞아주는 정희와는 다르게 조금 복잡한 형예의 마음.

 

그 마음 무엇인지 알 거 같다.

결혼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때를 넘기지 않으려 설득당해서 한 결혼.

남편은 늘 "아무것두 아닌 것 가지고.... 내 암말도 않으리다." 라고 말한다.

 

암만 생각해도 이게 아닌 성싶다. 맞장구를 치는 것도 이게 아니고, 당황해하는 것도 이거여서는 못쓴다. 아무튼 도통 이런 게 아닌 것만 같다.

 

 

제목이 결별이니 형예의 속뜻을 모르지 않겠다.

형예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달은 후에 어떻게 달라질까?

 

지하련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그 당시 상류층 여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 궁금하다면 지하련의 작품을 보랄밖에.

비교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자유로왔던 거 같다.

<체향초>의 삼희가 병을 이유로 친정에 그리 오래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삼희의 병은 친정에 내려왔기에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지금도 존재하는 오라버니들.

공부는 많이 하였으나 변변한 직업은 없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이러고저러고 살며 치열하지 못하면서 나름 치열한 오라버니들.

<제법 엄숙한 얼굴>로 오라버니라는 걸 뽐내는 그치들에 대한 이야기는 임솔아에게서 제이로 환생한다.

무엇 하나 자랑할 거 없으면서 자랑질로 하루를 소비하는 인생.

듣는 사람이 말을 돌려도 그 돌려차기에서조차 자신의 자랑거리를 찾아내는 말뿐인 삶.

인종차별을 반대하면서 인종차별을 당연히 하는 제이.

결국 장식장 밑에 들어가서 "여기 있어요."를 부르짖는 로봇 청소기를 끄집어 낸 건 영애다.

 

1930~40년대 여성의 대우와 현재 여성의 대우는 거기서 거기다.

말만 늘어놓는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는 모두 여자들이 한다.

아니라고 입에 거품 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임솔아 작가님이 지하련 작가와 짝이 되어 고민했던 것들이 무색하게 <제법 엄숙한 얼굴>을 잘 그려줬다.

지하련 작가의 통통 튀고 신랄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을 알게 되어 좋다.

묻힌 작가들을 찾아내는 작업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념이 우선이 되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이 대한민국 땅에서 아픈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글들을 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지하련의 글에서 그 어떤 사상도 찾지 못하겠다.

그저 시대를 앞섰던 여성들의 생각을 읽었을 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말뿐인 남자들 곁엔 늘 행동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 수염의 방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펼치자마다 긴장하게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

 

책은 시작하자마자 몰입하게 한다.

어떤 포석 없이 다이렉트로 문제와 마주하게 한다.

마치 방금 시작한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부터 보여주는 거 같다.

 

<푸른 수염의 방>

쌍둥이의 죽음을 느낀 순간.

멀쩡한 남자에겐 왜 그렇게 많은 여동생이 있을까?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방엔 무엇이 있을까?

뭔가 시원한 복수극일 거 같으면서도 어딘지 기괴한 이야기.

 

<G 선상의 아리아>

나는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건가?

아님 K 때문에 그렇게 변한 건가?

아님 엄마 때문에?

무엇 때문이었건 왠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야기..

 

<연모>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만남!

연모가 그 연모가 아니어라~

 

<최고의 인생 모토>

최고로 속 시원했던 이야기. 재미가 효율을 이겨버린 이야기~

너무 효율적으로 살지 마라~ 그러다 골로간다~

세상은 가끔 효율적으로 살 뿐 계속 비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진짜 얄미운 인간 때문에 속에서 천불나는 사람들이 읽으면 대리만족되는 이야기!

 

<자라지 않는 아이>

말이 독이 되어 품지 못한 사랑..

그럼에도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랑일까? 죄책감일까?

결국엔 그 어느 자식도 품지 못했던 슬픈 엄마의 이자 여자의 이야기.

 

홍선주 작가의 글은 처음인데 몰입도가 상당하다.

짧은 이야기에 담긴 함축적인 이야기들은 단편이기에 더 궁금증이 생긴다.

간결한 문장이 긴장감을 부르고, 생략된 이야기 속에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을 거 같다.

마치 떠오르는 단상들에 적당함이란 살을 발라서 완벽하게 구워낸 이야기들이 고소한 풍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파고들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긴 서사를 풀어낼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단편 속에서 원석처럼 숨어있다.

누군가 갈고닦아서 빛을 내주기 바라는 것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이야기 속 감정들이 점점이 퍼진다.

얼마 전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읽은지라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홍선주 작가는 정보라 작가와는 또 다른 결의 몰입도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야기꾼이다.

 

스릴러 좋아하는 분들

날도 더운데 장편 보다 단편! 인 분들

번역서에 찌들어서 신선한 모국어가 그리운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왜 <경찰 살해자>일까?

그건 이 시리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목이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살해자는 실제 경찰 살해자가 아니니까...

 

 

 

일반적으로 마르틴 베크는 살육당하거나 훼손된 시체를 조사하는 일이라면 머리카락 한 올 세우지 않고 태연히 해냈다. 속으로 불편함을 느꼈다손 해도, 귀가해서는 낡은 코트를 벗어던지듯이 그 기분을 떨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뭔가 제대로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느끼면 몹시 괴로워했다. 시그브리트 모르드와 폴케 뱅크손 문제가 그랬다. 유죄로 낙인찍혔고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던 남자. 이것은 린치나 다름없었다.

 

 

 

1973년이 배경인 마르틴 베크 시리즈 아홉 번째 이야기 <경찰 살해자>

4편 <웃는 경관>을 읽고 꽤 시간이 흘렀다. 9편에서의 베크는 어딘지 모르게 유해 보이고 편해 보인다.

그 사이 그는 국가범죄수사국 살인수사과 책임자가 되었다.

 

안데르슬뢰브에서 한 여자가 실종된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옆집에 사는 폴케 뱅크손이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다.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의 실종 사건에 마르틴 베크가 출동한 이유는 아마 유력한 용의자 폴케 뱅크손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 첫 이야기인 <로재나>의 범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역을 마치고 안데르슬뢰브에서 청어를 잡아 팔거나 달걀을 팔아서 살아가는 그가 또다시 살인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베크와 콜베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뱅크손은 시종일관 자신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건을 조사하는 베크와 콜베리는 차츰 뱅크손의 진술을 믿게 되고 새로운 단서들로 시그브리트의 과거를 조사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윗선에서는 뱅크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뱅크손은 체포된다.

 

그 와중에 가까운 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범인은 즉사하고 경찰들도 부상을 입는다.

두 명은 위중하고 한 명은 사망한다. 그 경찰의 사망 원인은 총상이 아니고 벌에 쏘인 것이지만 윗선에서는 총격전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현장을 모르는 윗선들은 그저 언론에 좋게 보이기 위해 애쓰고, 현장에서 신중을 기해 사건을 수사하는 베크와 콜베리는 그런 조직에 환멸을 느낀다.

 

<경찰 살해자>는 비대해진 경찰 조직과 경찰로서의 자질이 없는 경찰에 대한 환멸, 이미 죗값을 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을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모습, 복지국가의 최전방에 선 스웨덴의 실체를 다양한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1973년이 배경인 이 작품은 스웨덴 사회의 비리와 문제점을 말하기 위해 쓰인 마르틴 베크 시리즈답게 정치에 이용되는 경찰 조직과 현장을 모르는 간부들의 정치, 경찰로서의 자질이 없는 사람들이 일선에서 시민들과 대면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버무려놨다. 게다가 사건이 윗선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고 조작되는지 잘 보여준다.

 

범인 하나 잡기 위해 헬리콥터를 동원하고, 완전무장한 기동대를 출동시키고, 경찰견까지 대대적으로 출동시키지만 정작 범인 근처에도 못 가고 끝난 출동 장면은 스웨덴 국민들의 세금이 줄줄 새어나가는 장면이다.

그들을 잡은데 필요한 건 노련한 형사 두 명이었다.

읽으면서 실소를 금하지 못한 장면이다.

결국 노련한 형사 두 명은 사기꾼과 함께 앞날이 창창하지만 자칫 경찰 살해자로 낙인찍힐 뻔했던 청년을 체포한다.

총 한 번 쏘지 않고도 경찰 살해자가 되어 전국 수배가 내려진 아이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를 살려낸 것도 결국 성질은 불같아서 원성이 자자하지만 경험 많은 형사였다.

 

카메오처럼 출연한 사진 기억을 가진 멜란데르의 출연이 반가웠고, 콜베리의 결정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의 홀가분한 뒷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러므로 인해 베크가 더 외로워질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베크는 지금이 가장 안정적인 모습이고, 뇌이드라는 쾌활한 경찰과 인연이 닿았으니 많이 쓸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엔 전작의 가해자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로재나>의 뱅크손과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보만은 죗값을 치르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자 하지만 감시의 눈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50년 전이 배경이지만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만나는 사건들과 배경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범인을 대하는 경찰의 예의 바른 모습이 낯설지만 원래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낯설었다는 사실이 우리가 얼마나 강압적인 경찰의 모습에 익숙해졌는지를 알게 한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현란한 수사 솜씨를 발휘하는 현재의 경찰 소설과는 결이 다르다.

그야말로 독자들은 마르틴 베크와 함께 범인을 추적하게 된다.

주어진 증거와 드러난 사실만으로 독자들은 베크처럼 생각하면서 범인을 찾는 재미가 있다.

교묘한 트릭 없이도, 현란한 액션 없이도, 특별한 범인이 없어도 이 시리즈는 자꾸 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베크라는 형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사실을 마주하는 방법에 있는 거 같다.

 

이 시리즈는 독자를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해서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마주하게 한다.

그런 진지함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매력이다.

 

이제 하나의 이야기만 남겨 놓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

그 이야기엔 어떤 생각거리가 담겼을지, 어떻게 마지막을 장식할지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