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 (1960)(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Criterion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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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벌거벗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애타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인공들의 섹스라는 에로틱한 현재인지, 혹은 낙진을 잔뜩 묻은 채 죽어가는 히로시마 원폭 사태라는 과거의 두 사람인지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뜰히 애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간간히 삽입하며, 영화는 관객에게 히로시마 원폭 사태에 대한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여자주인공은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히로시마 원폭 사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여자에게 당신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그녀의 말을 부정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국적이 다르다그들은 처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옛날부터 연인인 사람들 같다그들은 먼저 육체의 결합을 통해 가까워졌다서로 애정을 느끼는 만큼 그들은 서로의 영혼에 가까워지려고 한다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탐색한다여자가 히로시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했던 것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인위적인 이어짐여자가 시도하려 하는 공통된 과거를 거부한다그들이 그 대화에서 소통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히로시마 원폭이 각자에게 있어 동일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다른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녀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일본 남자를 ‘당신’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느베르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죽은 독일인 병사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술집에서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죽은 군인이 아직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첫사랑이 죽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녀의 눈에 가끔씩 다른 사람의 이미지 위로 생생히 겹쳐 보인다. 독일병사는 기억이미지로서 현재이자 동시에 과거이다. 그녀가 첫사랑을 서서히 잊어가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이며, 동시에 죽은 그를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녀의 과거를 들은 남자는 자신만이 여자의 기억을 온전히 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이때껏 그녀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던 사랑의 기억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그 독일병사라는 과거와 동일한 위치임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인 독일인의 현재형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의 원리에 익숙하며 그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시간 이미지를 사랑이라는 소재와 연결시켜 보여주는 명작이다. 과거는 현재의 잠재적인, 또 다른 얼굴이다.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사랑과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었던 그 순간에 그녀가 독일 병사에 대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누어 가진 기억 속에서 죽은 연인은 현존으로써 불멸이 되었고, 과거이면서 현재인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가 와야 독일병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끝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랑에 있어서도 그들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과거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이 사랑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억뿐이다. 여자가 독일병사를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처럼 이 둘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함으로써 언제나 각자의 추억 속에서 그 기억을 잃지 않는 한 불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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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감독, 사샤 피토에프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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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는 것은 미궁처럼 이어진 부조리한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아름답고 몽환적인 카메라의 시선이나 움직임이 무척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들이 꽤나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시간이미지이다. 그 시간이미지는 미궁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꿈이기도 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카사레스가 소설 안에서 보인 환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혼동을 근사한 유럽적 분위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미지의 혼동이라는 테마를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포착하는 시간이미지는 더 강렬해지는데, 전개의 비논리성이 다소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이 어느 것의 앞에 위치하고, 무엇이 어느 것의 뒤에 위치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영화를 백 번 돌려본다 해도 아마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 X의 진술 속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과 여자 A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단순한 가정 혹은 짐작에 불과한 일인지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묘사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되는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알랭 로브 그리예인데, 그는 남자주인공 X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실로 있을지도 모를 사물들조차 무색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세부적인 기억의 묘사를 시도한다. X는 A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이미지와도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X의 진술과는 달리 열려져 있는 문 앞에 A가 서있는 장면이다. X는 나타나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내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었다고 애타게 외친다. 그의 간절한 내레이션을 듣는 관객은 그 때쯤이면 도대체 이 엇갈리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불일치와 모호함 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지표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에 진행되는 일이며 동시에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열이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영화가 갖는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반짝이듯 보이는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 연극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관객으로서는 놓치기 매우 쉽지만,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연극의 대사와 일치하며 주인공들의 밀회의 공간인 대저택의 공원 역시 바로 연극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이 연극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이 영화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합착되어 있는데, 그렇기에 이 장면은 결정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연극 장면은 마치 거울과 같은데, 영화라는 작업 안에 다시 연극이라는 작업이 내포되어 있는 상태로 영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끼리의 진술에서만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의 사건 그 자체들 속에서도 불일치와 식별불가능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대사의 일치는 기묘하게도 연극과 영화 속의 두 핵심주인공에서만 일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지나가는 대사 역시 그냥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면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와 닮아있거나 혹은 동일하다.

 

  이렇게 영화 전반에 이미지들의 혼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로브 그리예와 알랭 레네의 시간을 주제로 한 만남의 특성이 그대로 영화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감독인 알랭 레네의 경우 전작인 『내 사랑 히로시마』를 통해 현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미지의 테마를 보인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과거의 실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로브 그리예는 알랭 레네와는 다른 시간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의 첨점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로브 그리예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를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현재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항상 다채로운 현재로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치 등장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현재를 분배해주고, 그러한 결과로 서로 다른 현재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다우주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들의 공존은 영화 안에서도 여러 예시적 장면들로 상징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X가 A를 알았다 주장하지만 A는 X를 알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현재 역시 그러하다. 또한 총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과 달리 그것을 인물들은 부정하고, X가 밀회의 장소에서 도피하다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장면과는 달리 X가 멀쩡히 살아 A와 어디론가 떠나는 후반의 장면들도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암시들은 서로 상반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로브 그리예만의 것이 아니다. 로브 그리예의 다소 산만할 수도 있는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현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방랑하지 않는다. 이 순수한 현재들을 대저택이라는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알랭 레네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레네는 시간을 견고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바로크 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에서 분명히 굳건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이 바로크적 성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마치 퇴적되듯 성 안에 쌓인다. 그러한 기억의 퇴적, 견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정체는 맨 처음 펼쳐지는 연극 대사로도 제시된다.

 

  “몇 초만 더, 그것은 응고되어 갑니다. 영원히, 대리석의 과거 속으로. 돌에 새겨진 이 정원처럼. 이 건물, 방들은 이제 버려졌고,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아마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 많은 복도를 따라서 당신을 만나려고. 가면 같은 얼굴의 울타리를 거쳐서 주의 깊고 냉담한 얼굴들을 거쳐 당신 앞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여자배우가 “자, 이제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라고 말하며 끝난다.

 

  성 안에 쌓이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은 바로 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모든 현재들일 것이다. 알랭 레네가 제시하는 시간의 견고한 성 안에서 로브 그리예의 무한한 현재들이 마치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는 이 성 안에 퇴적될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쳐다보며, 초반에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멈추기까지 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닮았으며, 그들이 겪는 만남도 서로 유사한 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일지도 모르며, 이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성의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레네와 로브 그리예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해도 그들의 합작이 이런 근사한 이야기, 공간, 그리고 기억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시 현재와 과거가 아무리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본 정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생각처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영화 속의 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현실이자 과거인 방문객들의 기억들을 자신의 내면에 퇴적시킨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이라 생각할 정도로 직선의 공간인 성은 자신의 응고된 기억을 엿보려는 자들을 퇴적된 기억의 조각들과 화강암의 포석들 사이에서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다소 장난스럽게도,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라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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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조엘 코엔 외 감독, 저스틴 팀버레이크 (Justin Timberlake) 외 출연 / 콘텐츠게이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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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있습니다.



1. 

 

  포크송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주인공 말부터 맞더군요. 듣다보니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 같은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상관 없이 정말 좋은 노래가 개인적으로 세 곡이었습니다. 

  제일 좋은 곡은 Hang me ~ Oh, hang me 네요. 구슬픈 선율이 르윈의 '비참한' 인생 같아 제 맘이 시큰해졌습니다. 코 끝이 짜한 느낌 들게 만드는 불쌍한 노래지만,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표현하면 그 곡에 미안해져요. 콧소리 담긴 오스카 아이작의 인생을 보고 나면 왜인지 이해되는 가사가 별 볼일 없는 사람 마음을 더 울리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좋은 곡은 Please~mr.kennedy네요. ㅎㅎ 이건 저도 듣자마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웃기긴 하잖아요. 중간중간에 목소리 넣는 건장한 청년의 Outer! Space!가 진지살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근데 정말 몇 분 나오더군요.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긴 하지만.

  원래는 둘이서 부르다가 혼자 되어 불러 더 처량해진 Fare thee well도 좋았어요. 뭐 더 할 말은 없고, 이것도 가사가 좋더군요. 

 

 

2. 

 

  한 번 영화를 보고 나면 르윈 데이비스란 사람이 뭐하고 사는 놈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앨범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가 제목인가 싶었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이 뒤에도 반복되면서 그 인간이 왜 그런 소리 들었고,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그 인간이 어떤 면에선 참 한심하고 어떤 면에선 동시에 불쌍한 인간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캐리 멀리건 역의 배우가 거의 독기 품다시피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적어도 여자에 관련해 건드린 것들은 좋게 풀린 일이 없더군요. 자기 아이가 있다는 것을 낙태하려 했던 산부인과 의사한테 듣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허탈하겠죠.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과는 철저히 먼.

  이 영화는 영화답지 않죠. 주인공도 고전적인 면에선 주인공답지 않아요.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나오죠. 그런 주제에 자신만의 기준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 좋다고 음악을 하지만 음악이 자기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끔찍한 짝사랑을 보는 느낌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 처지가 이입되어서, 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비극적이면서 울림을 주었어요. 대박을 칠 음악의 저작권료보다도 현실의 돈 한 푼이 더 급해서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고, 남의 고양이 잘못 주워서 아주머니 비명 지르게 만들고. 그나마 자기들 거두어주시는 착한 교수님 부부 아니면 잠잘 데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

 

 

3.

 

  게다가 그런 주제에 죄책감까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자기 애 가진 여자가 있는 동네쪽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가던 길에 지나가던 괴물체(고양이 형상) 보고 급정거하게 된 그에게 뭔가 연민이 들더군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아마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자기가 주워온 고양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애 가진 여자들의 애도 그냥 쓱쓱 지우게 만드는 그ㅡ런 남자 이야기를 들었다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하나 싶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불쌍하더군요. 그리 살다가 타임즈에서 온 비평가한테 좋은 평을 받아서 대박 가수가 되는 꿈 ...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그의 그러한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잠자며 드는 꿈 같은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게 어른이 된 사람들한테 대다수 일어나는 일들일 거에요.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면 영화 속의 짐과 진처럼 어떤 식으로도 어떤 위치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다른 인생, 적어도 나보단 성공한 인생들이죠. 아주 잘된 사례들은 TV에 나오거나 엄친아의 경우처럼 주위 사람 건너건너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시켜 잘된 얘기 듣는 사람 마음 따끔해지게 만들겠죠. 아니 저 나사 빠진 놈이 대체 뭐가 나보다 낫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나만의 관점이고, 냉정한 세상은 르윈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과 다시 합치라는 조언이나 하죠.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 그게 대다수 인생일 겁니다. 안 될 놈은 안 되는 그런 불공평하고, 비참한 인생 말이죠. 그런데 그런 르윈 데이비스이기 때문에 그의 노래가 더 슬프게 들려오고, 그를 다룬 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영화의 수많은 영웅적인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 속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일 터입니다. 

 

 

4.

 

 

  아주 잘 만든 영화에요. 지금도 이 영화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지네요. 고양이가 지하철 바깥을 보는 그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잔잔하게 남습니다. 코엔 형제는 이 고양이 배우를 다루는 게 꽤나 힘들었다고 하지만요. 고양이 대역을 세 마리 정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겁 많은 고양이 키우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세상에 저렇게 잘 안겨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도 몇 초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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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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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상을 잘 못 받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안타까워 하진 않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배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 주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다 찾아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아이언 마스크]를 보고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더 안 찾아보긴 했지만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효리씨처럼 이름이 독특해서요. 이게 아마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얼토당토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름이 독특하면서 예쁜 사람은 그 이름 값을 하지 않나 싶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니, 너무 예술적인 이름 아닙니까.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 그의 작품들에 열심히 등장하면서 자기복제에 가까우면서 묘하게 반복적인 기능공 연기를 하는 그이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말씀 드리자면, 그가 절치부심하거나 대오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소위 '연기를 인정받는 상'을 받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기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잘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비슷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모든 배역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개인의 아우라가 사라지지 않기도 하는 감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 쟝고에서의 악역도 저는 사실 다른 작품들에서의 그가 보여준 연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옛날의 고운 얼굴이 사라지고 난 다음 거친 역할들을 많이 맡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 거친 역할들 자체가 서로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우에 대한 제 개인적 감상이 사족으로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이 배우가 보여준 그 비슷비슷한 연기들 속에서도 저는 이번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모습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이유는 왜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약에 취해서 엉금엉금 기어 고급 차(기종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에 올라타려고 발악하는 모습 보며 저는 레오나르도 고생했네를 연발 외쳤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두번째 마누라가 그냥 건성으로 마지막 섹스를 해주는 장면에서 완전 사랑에 도취된 채 삽입하는 연기 장면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연기를 그렇게 끔찍하게 잘 이해하며 영상에 표현하던지. 조단 벨포트 역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조단 벨포트의 정상과 몰락의 아주 세밀한 감정과 소회가 그의 얼굴에 분명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금융계에서 도덕 윤리따위는 잠시 안드로메다로 집어치우고 마약과 섹스를 일삼으며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남성들을 다룹니다. 섹스와 마약이 정말 오질나게도 나오더군요. 남성이 중점적으로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굳이 언급하자면 이곳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도 쉽고 거칠게 표현하면 속물들이죠. 조단 벨포트는 자본주의의 허락 받지 못한 사이비 교주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의 신도들은 교주와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주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부자로 사는 삶이 좋다. 부자가 싫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다 맥도날드 가서 서빙 일이나 해라. 그러므로 우리는 샤넬 옷을 입고 벤츠를 몰면 되는 겁니다.  마치 올림픽 경기를 뛰듯 연속적으로 쾌락 속을 종횡무진하며 자극과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바닷 속에 침몰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한때 배우 김정은 씨가 찍은 화제의 광고였던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를 생각해보면, 한국이든 어디든 그러한 소비행태가 권장되는 사태는 놀랍지 않은 일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반부터 극심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오르가즘이든 고통을 주는 자극이든 무엇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그 감각마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선에 도달해버린 것이죠. 이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절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눈을 부릅 뜨고 이 몰락을 차근차근 보았습니다. 실화라는 것을 강조하는 영화인데, 영화는 그저 영화 같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예쁜 여자들과 살면서 보기도 힘든 요트들, 집들, 물건들, 파티가 나오고, 무슨 범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약들이 쏟아져 나오죠. 우리가 예사로 들어본 마약들은 이 사람들 기준으로 마약 취급도 못 받는 것이고요. 이러한 삶에 젖어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삶이 멈춘다면 삶은 재미없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조단도 친구인 도니한테 마약을 끊고, 알코올을 중단한 다음 그렇게 말하죠. 인생이 아주 재미없어졌다고요. 인생은 사실 원래 재미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으로 삶을 영화처럼 살아온 거죠. 

   사실 몇 달 사이에 어떤 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네요. 듀나게시판 분이라서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거짓말 하게 만드는 상황에 빠지게 해놓고 그 누군가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말씀이셨어요.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씀이 생각났어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바로 함정 그 자체가 아닌가 싶어서요. 부자가 되는 것이 다들 좋다고 말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게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도덕과 윤리는 원래 승리자들한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조약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조단과 친구들에게 사기꾼 말에 걸려 넘어지는 그 어리숙한 놈이 그저 문제 있는 호구입니다.

   만약 지금 당장의 저에게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당차게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만약 제가 조단 벨포트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면, 아마 저는 지금처럼 살 것이냐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조단 벨포트의 삶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아질 거에요. 그런데 이런 유치한 양자택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자극의 힘을 끝없이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자본은 우리에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며 안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죠.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만' 잘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구조해 줄 정도로 배가 넓지 못하기 때문이죠. 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을 쫓아내야 배에 자리가 나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단 벨포트가 과연 '죄인'이냐는 문제에 있어 쉽게 입을 뗄 수 없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라고 불리는 윤리적 기준에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평범한 저란 인간, 영화의 마지막,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저 자신을 봅니다.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부추기는 사회, 이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조단 벨포트의 삶이 언제 내 삶이 될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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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수난 - [초특가판]
Carl Theodor Dreyer 감독 / 스카이시네마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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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의 얼굴이 카메라의 시선에 커다랗게 잠긴다. 빛나는 성스러움이 수수한 얼굴을 채운다. 곧 하얀 대사가 검은 화면 위에 고혹히 등장한다.

    “은총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계속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고, 은총 속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 영화의 판본은 맨 처음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첫 부분인 해설 자막은 이 영화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 ‘스타워즈’ 도입부분과 비슷하다. 방식 자체는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단순히 나열하는 평범한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치 잔 다르크의 화신처럼 검열 받은 영화의 불운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초기 판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성녀가 죽은 것처럼 장렬하게 화형 당했다. 

    그리고 어느 날, 80년대에 들어서야 노르웨이의 정신병원에서 잘 보존된 덴마크 판본이 발견되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던 걸까? 영성으로 충만한 이 작품이 세상에서 쫓겨난 자들의 구금된 장롱 속에서 그 야윈 깃털을 숨긴 채 간신히 숨 쉬며 은닉해 있었으니 말이다. 몇몇 조력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드디어 이 영화는 우리의 곁에 날아올 수 있을 만큼 깃털도 자라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100년 전 만들어졌을 그 당시의 모습 자체로 화석 같이 굳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음악이라는 생생한 변주가 곁들어져 있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영화가 상영될 때는 현장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방식이었는데, 시중에서 현재 접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판본인 Criterion Collection에서는 리차드 에인혼의 “voices of light”가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역시 이 판본에 나오는 해설자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차드 에인혼의 음악들은 1994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예술적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무성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음악적 해석을 체험할 수 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어떠한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선정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에인혼의 음악은 실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위해 봉납된 신실한 제물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한 시도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까? 칼 드레이어 감독이 잔 다르크가 치른 전투에서의 수많은 업적을 영화에 형상화하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칼 드레이어 감독을 놀라게 한 것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 앞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소녀 그 자체였다. 이 영화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배경이다.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본다. 인물들에 대한 강렬한 클로즈업은 신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와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가녀린 소녀의 대립만을 보인다. 그녀의 공적에 대해선 언급도 되지 않으므로,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더욱 무력하고 평범해 보인다. 

    영화가 비추는 소녀의 얼굴과 성직자의 얼굴 주름들은 영화 전체에서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인간인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속마음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주목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참된 대립각은 성직자들과 잔 다르크만이다. 내면의 감정만이 핵심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국적이 아닌 권위자들과 권위 없는 한 소녀의 대화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가장 기본으로 한 것 역시 심문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화록이며, 이 대화록에서 보여준 잔 다르크의 신성함은 자신을 짓누르는 권위에 맞서 대항하는, 그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서는 도출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현되는 내적 힘이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조롱하고, 가히 침을 뱉듯 그녀를 이단이라 비난한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리스도교 정통파 성직자들에게 괴물이다. 서커스의 야수이며,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천한 여자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잔 다르크는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숫자를 센다. 성직자들이 모두 기가 막혀 한다. 주기도문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낭송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널 보내셨다고?”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적어도 부름이라도 받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유식해야 하며, 교육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성 옷을 입는 것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자로 우선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주제에, 잔 다르크는 감히 수많은 질문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술렁인다. 잔 다르크에게 미카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그녀가 보았다는 천사의 존재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무신론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성직자들은 소녀 하나를 앞에 두고 몰락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말들을 하나하나 말하지만, 성직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두려움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는 잔 다르크를 향해 성직자들은 신성모독을 외치는데, 그들은 잔 다르크가 신과 영접했다는 사실을 완벽히 부인한다.

    이 나이 많고 많이 배운 남성 성직자들의 모습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과연 성직자인지 세속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가상의 관념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며, 그들 안에서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들한테 신의 진리가 먼저인지, 아니면 현실의 복잡한 정치 관계가 먼저인지? 게다가 그들은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를 부정하는데, 그 모습이 시기 어린 질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들의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신이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강림하여 그녀의 조국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그녀에게 길을 제시하였단 말인가? 만약 어떤 길이 필요했다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진한 남성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왜 다가가지 않으셨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라는 것이 진정 있다면, 신이 대체 언제부터 미천한 인간에게 그 뜻을 가르쳐주려 했단 말인가? 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했던 적은 있는가? 성직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이르며 결국 그들이 그녀에게 부여하는 괘씸죄는 정치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녀를 파괴하는 이유는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여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사회적인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세속적 노력과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지한 여성이 신을 만났다는 참을 수 없는 ‘불경함’ 때문이다. 

    그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지 못한다. 성직자들은 그녀에게 자신들의 신을 강요한다. 자신들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신은 과연 신인가? 그들은 그녀에게 착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를 구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능한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 타락한 지상에서만큼은 권력을 잡은 신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이 내려왔다 한들 그 사실을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진심으로 신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변질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유일한 길은 그녀를 죄인으로 모는 것뿐이다. 몇몇 양심적이고, 진실한 성직자들만이 자신들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녀를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다. 다른 성직자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성직자들은 신이 있는 하늘로 닿기에는 지상의 인간 사회의 굴레에 지독히도 묶여 버렸다. 그들은 지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학식 있는 박사님들이 과연 잔 다르크 너보다 현명하단 말이냐.”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신이 더 현명하십니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치한다. 잔 다르크가 성직자들을 향해 한 명씩 악마라고 가리키며 비난하는 강력한 정서의 폭발은, 무성영화의 역사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일 것이다. 

    전쟁영웅인 잔 다르크가 이 핍박 속에서 언제나 꿋꿋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은 그녀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로, 끝없이 절망하고 눈물 흘리는 소녀로 그린다. 그녀가 고통 앞에서 의연함만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강력한 철의 여인을 기대한 사람들로서는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그녀가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녀의 숭고한 내면의 전장이 가치를 갖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는 대사와 언어가 보여줄 수 없는 심연을 엿보게 되고, 그러한 지경에서 희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는 잔 다르크가 되어 유래 없는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한다.

    이어서 소녀를 윽박지르는 교회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들은 그녀의 왕, 조국을 들먹이며 그녀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것을 종용한다. 팔코네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진다. 마침내 잔 다르크가 굴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성직자들은 그녀를 파문시키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를 그들의 보호 안에 죄인의 이름으로 잔 다르크를 수감시킨다. 부조리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다. 

    삭발한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좌절의 눈물. 잔 다르크는 영화 내내 새처럼 쉼 없이 울지만, 이 장면만큼 그녀가 우는 모습이 가련해 보이는 장면은 또 없다.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는 이내 밝혀지듯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 즉 신의 말씀을 두려움 앞에 거절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곧 재판관들을 다시 소집한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밝힌다. 그녀가 고백한 죄는 바로 거짓말, 신에 대한 불복종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었던 말들을 신의 음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 아니라 부정하지 못한다. 죽음이 결국 그녀를 꺾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그녀의 비극에서 바로 그녀의 성스러움이 태어난다. 그녀는 못 배웠고, 비천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인간이다. 곧 이제 화형 당한다는 말에 잔 다르크의 오른쪽 뺨이 근육경련을 일으킨다. 그녀를 도와주던 성직자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을 아직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자신이 그의 자식이며, 신이 자신의 승리와 순교, 죽음까지 약속했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 

    성직자들이 마지막 미사를 준비한다. 그녀를 경멸했던 자들도 이제 함부로 다시 비웃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 고해, 미사를 받는다. 잔 다르크를 음해하고자 했던 성직자가 그녀의 미사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그녀의 신실하고 순수한 믿음이 부러웠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 자격을 갖추는 것까지도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실천이 어렵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결국은 그 남자의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잔 다르크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민중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잔 다르크의 화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녀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너무 오랜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끝까지 주님을 찾는 그녀, 아이가 젖을 물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젖을 문다. 신이 그녀를 보고 있을까? 십자가조차 빼앗겨지고, 그녀는 끝없이 울며 화형대 앞에 혼자가 된다. 교회 지붕의 끝, 십자가에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 장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죽는 걸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눈물조차 뜨거운 열기를 식혀 잔 다르크를 지상에서 구원 받게 해줄 수는 없었다. 

    민중의 누군가가 성녀를 화형 시켰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성의 병력은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죄인이 된 성녀를 성녀라 불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폭압의 상황에 놓인다. 계속 불타는 그녀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마지막, 혼란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녀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녀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찬양한다. 나 같은 경우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녀가 보고 들은 것, 혹은 그러했다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그녀가 신의 이름을 걸고 나온 광인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였는지 말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나의 논평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에 나온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가 형상화한 대화록 안에서의 잔 다크르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잔 다르크가 진정 신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믿은 사람이며, 지상의 모든 욕망과 공포라는 감정들로부터 연유되는 시련들을 통과하여 자신이 가야 한다 믿은 곳으로 갔다는 사실 말이다. 한 특정 종교의 힘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럴 거면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이 믿는 신의 길을 따르는 데 실패한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도덕률’, 내면의 소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믿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신이든 마귀든 무엇이든 다른 인간들의 억압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바늘 같이 소름끼치는 눈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 할까봐 무서워 덜덜 떨게 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낸다는 것, 그 행위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해내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것을 해낸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그녀가 믿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서, 그녀가 나에게 성녀가 아닐 이유는 없다. 단지 그녀가 무식하고 순수해서 가능했던 일인 걸까? 글쎄, 원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가장 솔직하기 마련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런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멀리 안 가서도 개인성이 역사상 가장 존중 받는 지금의 시대에서도 우리 모두 잘못된 일이란 걸 알아도 대부분 다 군말 없이 까라면 까라는 대로 하지 않나. 종교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아닌 걸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은 항상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리고 억압이 크면 클수록, 지켜내기 어려운 일이면 어려운 일일수록 그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는 것이 이치이다. 칼 드레이어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놀라운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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