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님 서재에 갔다가 당신이 쓴 글을 읽고 문득... 어느 대목에서 내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 집 사람은 '당신은 큰 돈엔 참 둔한 데, 작은 돈엔 유난히 연연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돈셈에 서투른 탓도 있지만 어쩐지 큰 돈은 내 돈 같지 않아서 실감이 나지 않는 반면에 작은 돈은 내 돈 같아서 무척 아깝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곧바로 아내에게 월급통장을 맡겨버렸다. 고교 졸업 이후 자기 돈 자기가 관리하던 이에게 경제적 독립의 상실이란 다시 경제적으로 무능한 십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아내를 유난히 신뢰한다거나, 재테크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귀찮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아내가 바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인에겐 그 귀찮음도 즐거움인지 몰라도 기꺼이 떠맡아줬다. 어쨌거나 생활의 문제를 모조리 아내에 떠넘기고(가사 일을 전혀 돕지 않는단 말은 아니다), 나는 용돈이나 타 쓰는, 신선 같은 삶을 누리고 있다. 사실 내심 생각하기로 신선이 이슬만 먹고 사는 이유도 마누라에게 월급통장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월급통장을 아내에게 맡기지 않은 신선들 대부분은 연못에서 나뭇꾼들에게 속아 도끼 삼종 세트(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나 안겨주는 작자들이다.
어쨌거나 나는 아내가 심부름시켜서 내 돈으로 장을 봐온 뒤, 우수리 돈을 주지 않으면 오랫동안 속이 상하고 심지어 야비한 복수를 꿈꿀 만큼 토라지기도 한다. 내가 그렇게 인색한 남자도 아닌데(가끔 기분 내키면 외식비도 내고, 이것저것 사다바칠 때도 왕왕 있었다), 줄 돈은 깨끗하게 주었으면 하는데, 아내는 용돈 주고 다시 뜯어가는 재미가 쏠쏠한가보다. 하여간 나는 한 달 월급 액수도 모르고, 당연히 1년 연봉도 모른다. 나는 몰라도 아내가 안다. 아내가 맞벌이를 하지 않았다면 사는 건 참 빡빡했을 거란 것쯤은 나도 안다. 나도 모르는 내 연봉이나 월급은 나보다 우리 회사의 경리부장이나 내 밑에 있던 녀석들이 더 잘 알곤 했다. 이재에 빠른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가끔 주도면밀하게 손해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적고, 조건이 열악한 탓에 우리 회사의 이직율이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직 어린 탓인지 모르겠는데(이런이런... 이런 표현이 가능한 연령은 절대 아니란 거 나도 안다) 나는 아직도 길 가다 동전이 떨어져 있으면 못 본 척 절대로 할 수 없다. 심지어 친구집에 놀러갔다가도 동전이 방바닥에 뒹굴면 몰래 주머니에 넣곤 한다(음, 이거 도둑질인 거냐). 이걸 물욕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 사람들은 특히 나의 직장 상사들은 내가 돈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글자 다루는 작자들이 숫자에 좀 덜 떨어지게 구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월급을 쥐꼬리만큼 주면서도 쟤는 돈보다는 보람으로 일하는 아이라고 스스로들 자위하고 싶어 만들어낸 궁여지책의 변명인지도 모른다.
아차차, 이 회사에 왜 다니냔 질문에 답하자면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대범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일이 좋아서 다닌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옹색하게 말하자면 나도 이제 마흔줄에 접어드는데 오란 데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후자를 이유로 생각하면 서글퍼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실이 별로 두렵진 않았다. 왜냐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일엔 어려서부터 익숙했고, 나이 먹고도 돈이 없으면 얼마나 서러운 꼴을 당하게 되는지도 잘 알지만 최소한 우리 두 내외 못 먹고 살겠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좀더 현실적으론 마눌 등쳐먹고 사는 게 내 평생 소원이다). 하지만 산이(태명)가 생기고 나선 그것도 참 쉽지 않은 선택이겠구나 생각이 든다.
같은 회사 다니는 녀석이 충고랍시고... 내게 두 가지 충고를 해주었는데 하나는 절대로 병원에서 공짜로 주는 분유에 아기를 길들이지 말라는 것, 특히나 최고급 분유 샘플(일반적인 상품보다 작은 사이즈란다)을 공짜로 싸주는데, 아이가 한 번 그것에 맛들이면 절대로 모유를 먹지 않으려 든다는 거다. 그러면 돈도 많이 들고, 아기 건강에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아기 젖병 삶아대느라 내가 책 볼 시간도 없을 테니 되도록이면 모유를 꼭 먹이란다. 흠, 어쩐지 식인종 식의 오래된 농담이 떠올랐다. 모유가 좋은 이유? 용기가 아름답고, 보관이 용이하고....어쩌구저쩌구 말이다.
두 번째 충고는 아이가 뭔가 하고 싶다, 갖고 싶다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해주게 되면 엄마는 모르겠지만 애비로서 자신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작은 인간 같이 느껴진단다. 평소에 그 녀석이 워낙 짠돌이처럼 굴어서 밉살머리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순간 존경스러워졌다. 음, 그런 이유였던 거냐?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유난 떨 마음은 전혀 없지만 최근 나는 '가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아직 실감나지 않는 고민이기도 하다. 이 회사에 다니는 이유와 가난에 대해 함께 고민해봐야 하는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