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구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꺽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잠시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고3때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그때 영화를 보고는 '아...저 때는 저렇게 힘들게 일했구나', 주인공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하는 장면에서는 '배우 고생했겠다'...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을 인상적으로 보았을 뿐...

대학을 가고 선배들이 나에게 자주 물어봤던 질문 중의 하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를 봤냐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봤고, 그런 모든 내용을 담기에는 영화가 다소 짧았다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냥 무심코 한 대답에 선배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전태일이란 이름을 그저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분신자살을 한 사람 정도로만 기억할 뻔 했다.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자신도 가진 것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늘 배고팠고, 추위에 떨었고, 누군가에게 쫓겨다녀야했고, 맞아야했다. 어린 나이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구두닦이, 우산장사, 신문팔이 등등의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평화시장에 붙어있던 '시다구함'이라는 광고를 보고 그는 16세의 나이에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는다.

거리에서 떠도는 일명 '거리의 천사'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건 두 가지의 길 밖에 없다. 하나는 범죄의 길, 또 다른 하나는 노동지옥의 길...전태일은 노동지옥의 길을 택했다.

평화시장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 하루 15시간...그조차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먼지꾸댕이 속에서 잠 안오는 주사를 맞아가며 일하는 곳...한 달에 딱 두 번의 휴일...건강검진 같은 건 없다. 그 속에서 5..6년 정도 일을 하면 100% 병에 걸린다. 병에 걸리면 무조건 해고이다.

그 자신도 빈한했다. 제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든 노동지옥 속의 노동자가 아니었던가...그런데 무엇이 그를 스스로 붙태우게 만들었는가...



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처음에는 그저 재단사가 되고자 했다. 평화시장의 인력구조에서 재단사는 일거리를 조정하는 정도의 약간의 재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사가 되면 시다나 미싱사의 편의를 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프다고 병원데려가고 직원들 쉬게하고 본인이 혼자 일을 도맡아 하자 사장은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해고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러저런 호소도 해보았으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근로기준법이란 책은 닿고 닿도록 보았다. 바보회를 조직했고, 삼동회를 조직했다. 노동청도 찾아가보았고, 신문사도 찾아가보았다. 진정서도 내 보았고,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쓸 생각까지 했다. 그가 할 수 있는...아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까지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하는...

인간을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으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하고 비정한 현실의 냉혈한 얼굴을 가진 세상은 전태일에게 마지막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주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불타는 몸으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이게 그가 스스로 몸을 불태워 외친 말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불을 끄고 병원에 왔으나 의사는 가난한 그에게 화기를 낮춰준다는 주사 한대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마지막으로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배가 고프다'...그 평생의 고통이었으리라...



지금 그가 죽은 청계천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변했다. 그러나 그를 그토록 매몰차게 내몰았던 세상도 그만큼 변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세대에게는 성전과도 같았던 이 책은 아직도 팔리고 있지만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도 성전이 될 수 있을 것인가...아직도 그의 외침은 유효한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자와도 같았던...가난하고 나약했으나 그 자신보다 더 나약한 자를 위해 스스로 불꽃이 되었던 아름다운 청년...


아직도 그를 모르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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