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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 느림으로 가는 정거장
풀꽃세상을위한모임 엮음 / 그물코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할머니는 오늘도 작은 보따리를 들고 나오십니다. 이 꼭두새벽에 굳이 오늘까지 나올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내일부터는 나오라 해도 못 나오실 테니 타박 대신 서로 미소를 건넵니다. 연애할 당시 이 열차를 참 많이 이용했다는 부부는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 조금은 상기된 얼굴입니다. 이젠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많은 중년의 아저씨는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글픈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합니다.
2007년의 마지막 날. 군산의 꼬마열차는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길을 뚫고 그렇게 마지막 여행을 했습니다. 직접 키운 자식 같은 채소며 이것저것을 들고 옆 동네로 새벽시장을 나서시던 할머니와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하던 나이 어린 청년들을 태우고 달리던 꼬마열차는 고속철의 개통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더불어 도란도란 피어오르던 이야기로 가득했던 간이역도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TV에 담긴 꼬마열차의 마지막 여행은 한쪽 구석에 앉아 진한 상념에 잠긴 아저씨의 심정이라도 전해진 것처럼 쓸쓸한 기운을 남기고 맙니다.
간이역이라는 고운 단어가 주는 느낌은 추억과 아련함, 혹은 고향의 푸근함과도 같겠지만 이 책 ‘간이역’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도시의 삭막함에 지친 이들에게 독서가 간접적으로나마 전해 줄 수 있는 추억의 연장이 아닌 바로 그 추억과 아련함을 앗아가는 속도에 대한 반기입니다. ‘느림으로 가는 정거장’이라는 부제 속에 담긴 그 의미는 책을 펼친 순간 앗! 하는 당혹감에서 한 두 페이지는 넘기는 동안 차차 떠오르는 속도에 대한 고민을 넘어 종국에는 내 삶의 고요한 응시로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에 차오르는 건 알지 못했던 것들 혹은 외면해 왔던 진실에 대한 불편함과 사뭇 진지한 생각들, 미안함, 때론 스산함입니다.
“간이역은 분주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바람만 불고, 햇살 이글거리는 여름에는 매미소리만 가득 찹니다. 눈 내리는 겨울, 사람들은 오바깃을 세우고, 온통 마후라로 머리통 휘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완행열차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이 책의 초판은 2005년 1월. 내 손에 쥐어진 책도 2005년 1월 초판본. 이 책에 적힌 고민과 생각들은 현재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속철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서울과 부산이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에 대해 TV가 한동안 떠들어댔던 걸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이제야 읽는 건 참으로 무의미해 보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왜소하고 가냘프기만 했던 비구니를. 10분, 20분이 빨라진다는 속도를 위해 땅을 가르고, 산을 베어내고, 생명을 앗아가겠다는 세상의 거대한 힘 앞에 홀로 맞섰던 가녀린 여인이 있었음을.
발행 4년을 넘기도록 다음 판을 찍어내지 못한 책은 사람들에게 어떤 스침조차 주기 어렵겠지만 아직도 절판되지 않은 생명력을 발휘하며 끝내는 내게 읽히고야 만 이 책이 간이역과 같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재빠르게 거대한 물량을 찍어내고 사라지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느릿느릿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건네지고 읽힌 책 한권이 주는 반향은 호감보다 비난이 앞섰던 세간의 시선에 홀로 맞선 한 여인이 주었던 향기와 비슷합니다. 화려한 겉이 아닌 속에 담긴 진정함은 오랜 시간 은은한 향기를 남기는 법이니까요.
“간이역은 오랫동안 이 땅의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던 달구지같은 완행열차 정류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망할 속도중독증의 미친 세월을 만나, 이 땅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간이역은 다 떨어진 고무신짝처럼 버려지고, 허물어지고, 잊혀져 내동댕이쳐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꼬마열차가 운행하지 않게 된 날, 할머니는 새벽 무렵 부지런을 떨며 봇짐을 들고 나서던 걸음 대신 푸욱 달게 새벽잠을 잤을까요. 매일 출근을 하던 젊은 청년은 무엇을 타고 일터로 나갔을까요. 닭도 내리고, 흑염소도 내리고, 강아지도 내리던 간이역은 이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간이역으로 상징되는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심성의 사람들, 무서운 속도의 광증에 온몸을 내던져 ‘이게 아니오’라고 신음하고 있는 분들을 떠올리면서 풀꽃세상은 간이역이 회복해야 할 느림과 반개발의 가치를 절박하게 웅변하고 있다고 여겨, 제10회 풀꽃상을 ‘간이역’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