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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들 중 건물 수위 아줌마인 르네는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합니다. 처음 편집자에게 보낸 원고에서 나는 이 여인을 약간의 저급하고 비속한 말을 상투적으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풍자가 요구하는 수위들의 화법처럼 말이지요. 그러자 편집자이자 소설가인 장 마리 라클라브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소설가입니다. 당신의 수위 아줌마도 게르망트 공작부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할 수도 있고, 완곡하게 돌려 말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식은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부자들의 오만함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거니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니 굳이 내가 그런 진흙탕에 발을 딛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록 그들의 오만함에 구역질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도도함과 예의 없음에 넌더리가 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럴 자격도, 갖춘 것도 없다며 나를 감추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나는 내 공간 안에서 행복하다.
르네는 고급 아파트인 그르넬 가 건물의 수위 아줌마다. 늙고, 뚱뚱하고,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면서 하염없이 텔레비전을 보는 수위 아줌마라는 사회적인 믿음에 딱 들어맞는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여느 수위 아줌마가 아니다. 르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베니스의 죽음’을 보면서 예술의 기적 앞에 황홀해한다. 네덜란드 정물화를 좋아하고, ‘오즈’의 영화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공작부인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수위 아줌마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열두 살인 팔로마는 열세 살이 되는 날 자살을 결심했다. 그르넬 가의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부모는 부자고, 집안은 부유하다. 문제는 너무 별나게 똑똑하다는 거다. 팔로마는 자신만큼 똑똑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도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고, 결국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들처럼 끝을 맺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인이 되어도 삶의 부조리에 저항할 수 없는 이상 여기서 끝낼 것이다.
[그녀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가시로 뒤덮여 있어 진짜 철옹성 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밈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고 난 직감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 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가시로 덮인 고슴도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춘다. 철저하게 본 모습을 가리고 그들이 원하는 수위 아줌마가 된다. 하지만 온갖 위선으로 가득하고 우아함을 가장한 천박한 부자들이 떠나고 나면 그 뒤에서 고슴도치는 참 유난스럽고, 호들갑스럽다. 쉼표(,)의 사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시제라도 한 번 잘못 썼다간 멍청한 사람으로 그대로 낙인찍힌다. 타인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 수위실 문을 꽝 닫으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세상의 온갖 사람들을 모두 속물적이고, 멍청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고,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일본의 모든 것을 동경한 나머지 6층의 음식평론가가 죽은 후 새로 이사 온 일본인에게 지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 일본인은 예상대로 무척 예의바르며, 그는 ‘안나 카레리나’를 비롯한 놀라울 만큼의 공통점으로 우정이 싹트고 있는 중. 그리고는 혹여 이런 자신이 들킬까 매사 노심초사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르네의 반응과 생각은 단지 부자이고 상류계층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은 못 배우고 가난한 수위 아줌마보다 나을 것도, 우월할 것도 없고 때로는 모자라는 것도 많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임을 알겠다. 소설은 르네와 팔로마의 사색을 통해 눈으로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님을, 삶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황홀함을 가르친다.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고 한다. 우아함이 우아함으로 머물지 않고 넘치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보다 극단적으로 말해 작가의 개인적 취향의 집합체이다. 르네와 팔로마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단어와 취향, 사색, 책 속의 모든 설정은 온통 작가가 동경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고, 작가는 그것들이 얼마나 좋은 지 또 당신들이 얼마나 무지한 지를 독자들에게 일일이 가르친다. 어떻게 보면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정도는 알아들어야 당신도 뭐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는 해야 당신도 똑똑하고 예의 바른 범주에 속한다. 이 정도는 향유할 줄 알아야 당신도 우아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동감할 줄 모르는 이상 당신도 실은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만 요란한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작가가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 줄 알았다면 끝간데없는 잘난 척에 나자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쉰네 살 수위 아줌마와 열두 살 천재소녀의 감동 어린 만남!’이라는 카피에도 불구하고 둘의 만남은 너무 늦는데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채 르네는 사고로 죽고, 팔로마는 자신의 자살 계획이 별문제 없는 사춘기 소녀의 사치이자, 관심을 끌기 원하는 부잣집 여자애의 합리화였음을 깨닫고 계획을 취소한다.
고슴도치는 철옹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오만한 부자들은 아무리 르네의 입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나와도, ‘오즈’ 영화의 경이로움을 찬탄해도 늙고 뚱뚱한 수위 아줌마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 도착할 소포를 제대로 전달해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세상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우아함을 이야기하는데 잡다할 만큼의 유식한 문장과 유난스러울 정도의 비아냥까지 내세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르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끼 위의 동백꽃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