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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르츠 바스켓 17
타카야 나츠키 지음, 정은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후르츠 바스켓에서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다 상처가 있다. 그것도 보통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깊고 깊고 너무 깊어서, 손을 내미는 것조차 두려워지는 그런 상처들.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고 보듬어보지만 여전히 힘겹기만 하다. 그리고 그 상처의 중심에는 아키토가 있었다.
난 아키토가 가장 싫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십이지들에 대한 집착, 그것도 십이지남자들에게만. 자신은 사랑을 주지 않는 주제에 십이지들에게는 맹목적인 애정을 강요하고, 성에 차지 않는다고 화풀이하고 상처를 주며 즐긴다. 아키토라는 캐릭터보다 훨씬 더 나쁘고 싸가지 없으며 밥맛 없는 캐릭터는 다른 만화에서는 많이 있지만, 아키토는 그냥 나쁜X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꼬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자라면 이렇게 되는지. 그래서 후르츠바스켓 애니에서 나온 것처럼, 죽음으로 치닿는다는 것을 보고 아 그렇구나, 납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17권을 보고 아키토가 왜 그 따위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들이, [그녀]로 바뀌었을 때. 왜 십이지 남자들에게 집착했는지 알 수 있었고, 또한 시구레와의 그 미묘한 대화들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시구레의 표정이나 대사, 독백들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결국 사랑의 결핍. 모든 것은 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토오루는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께 잠시간이나 버림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로인해 아버지를 모방하며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어머니는 일찍 죽어버리고 혼자 남겨졌다. 필사적으로 웃고 밝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 어둠은 그녀의 마음 속을 좀 먹어 들어간다. 유키는 아키토에게 학대받은 것보다는, 부모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았고, 시구레 역시 그렇게 매사에 불일치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 실없이 웃다가도 문득 무섭도록 싸늘해지는 이유는, 제멋대로인 아키토에 대한 애증때문이었다. 그외의 다른 캐릭터들 역시 마찬가지. 아키토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은 아마도 다 나오지는 않았지만 맛간 그녀의 어머니 때문일테고.
모든 이의 상처는 사람으로 부터 받는다. 하지만 그 상처는, 사람으로인해 치유된다. 이 모순을 후르츠 바스켓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미 치유받고,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한 십이지들이 있는 반면, 아직 치유되지 않은 십이지들. 초반에 후르츠바스켓을 보며 주인공인 토오루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십이지의 저주를 풀어줄 것인가 궁금했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이 만화의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저주를 풀어나갈 것인지도.
후르츠바스켓은 판타지가 아니다. 십이지라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들의 상처를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 그것이 해결되는 데는 방법은, 비현실적인 것에는 있지 않다. 그들이 십이지가 되어 받은 상처들은, 누군가를 통해서 치유를 받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 저주에서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처들과 악화되어 가는 듯한 이 아픔들은, 이 후르츠바스켓의 끝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이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캐릭터들, 그것도 단 한명도 마냥 행복한 존재가 없다. 모두 다 큰 상처를 가슴에 지고 살아가고, 눈물을 삼키고 웃는다. 그 웃음이 더욱 더 자신의 상처를 짖이겨놓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감추지 않고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며 마음껏 아프게 한다.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몸이 두동강이나는 것같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 아픔 뒤에, 그 아픔을 이겨낸 뒤에 올 진정한 미소를 위해. 가면같은 미소가 아닌 눈물이 맺혀 있더라도, 희망이 있는 미래를 비추는 미소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결국 이 만화의 주제는 이것이다. 극복.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이 만화가, 나는 정말로 좋다. 읽으며 내 모습을 본다.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나만의 아픔들을, 나만의 생각들을. 그렇지만 그에 절망하지 않고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눈부시다. 후르츠바스켓. 각기 다른 종류의 과일들이 한 바구니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후르츠바스켓이라는 만화 속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다른 모습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후르츠바스켓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세상은 정말 과일바구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