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책 + DVD) - 맨발천사 최춘선, 김우현의 팔복 시리즈 1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미디어다음에서 접한 동영상에서는 조악한 화면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음향시설이라고는 전무해서 말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전철소리 속에 자그맣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역사상 가장 큰 자비의 초대, 예수 십자가 자비의 초대. 화면에 비쳐지는 모습은 자그만한 어깨가 잔뜩 휜 어느 노인의 모습이었고, 목소리도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제법 큰 목소리였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그리고 이어지는 그 노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보는 나로서도 낯뜨거울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노인,.. 어느새 보고 있던 나도, 그 노인을 비웃고 뜨악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같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보고 나서도, 그냥 무덤덤했다. 약간, 말로는 설명하긴 힘들지만 미묘한, 무언가가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 동영상을 보고 운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책을 구입하게 되고, 작고 이쁘게 싸여진 책은 제법 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한 눈에 보기 좋은 사이즈로 나온 책을 문득 펼치고, 이윽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내용과는 다른 김우현이라는 사람의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이고 씁쓸한 어조의 글이었다. 그리고 동영상에서 봤던 노인이 등장했다. 동영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약간의 뒷 얘기, 띄엄띄엄 말하는 통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활자로 펼쳐졌다.

분명 처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장면이 아닌데에도 왠지 울음이 울컥 넘어 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슴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울음, 알 수 없는 아픔이 넘어와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읽다가 울고, 또 읽어나가다가 또 울고, 반복하기를 여러번, 드디어 책을 덮었다.

 

지난 몇 달간, 나 자신도 섬뜩할 정도로 무미건조해진 나날의 연속이었다. 버릇처럼 신앙서적을 사모으지만, 보면서도 그냥 흥미 위주였을 뿐 그다지 아무런 감흥도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리뷰를 쓰면서도 솔직히 쓸말이 없을 정도로, 내 감정은 메말라 있었다. 제작년 11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난생처음 부흥회 준비기도란 것을 하고 매일매일 모여서 교회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도 했었을 때가 있었다.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렇게 뜨겁게 주님을 사모했던 것은 그 때가 최초였었다. 그리고 한 달 두달, 초신자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매일매일을 울고 기도하고 가슴을 치며 보내고, 그렇게 또 몇달이 흐르고 서서히 원망과 체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원망하면 안된다는 말은 또 들어서는 그 감정으로부터 그 상실감으로부터 도피하여 닥치는 대로 만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있던 순간은 달콤했고,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또한 책을 덮고 나서도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 그 토록 가슴을 치던 괴로움은 느끼지 않아도 됐었다. 좋은 거라고, 편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토록 달고 달았던, 황홀했던 예배가 그냥 그렇게 그냥 좋은.. 그냥 그런.. 예배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찬양을 부를 때도 큰 기쁨은 얻을 수 없었다.

... 실로 그 때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오늘처럼 목 놓아 울어본 것은.

무엇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최춘선 할아버지가, 그의 삶이, 그의 행동과 말들이, 이상하게 가슴을 쳐서, 쥐어뜯지 않고는, 울부짖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만 쓰라리게 부딪혀 오는 것들, 후회. 저런 사람도, 저런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충만하여, 진정 가난하게 되어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난 대체 이게 뭔가.

기도라는 것은 무언가를 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당연히 날 축복해서 부요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날 축복하지 않으면 뭔가 서운하고 섭섭하고 뭔가 이상하고, 기도를 받는, 말씀은 듣는 의미가 그다지 없어지고, 매일매일 고된 회사 생활을 버텨나가기가 힘들고,. 그랬다. 내 죄를 지고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은 이미 내 머리 속에서는 지워지고 없었다.

예수 십자가 자비의 초대. 왜 이리 이 말이 마음을 울리던지.

어찌 그리 오만했던가. 어떻게,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교만했던가. 당연히 부해져야만 한다고, 축복만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 구역질날 정도의 오만함이여. 물질을 부어주심으로써 쓰임받는 자도 분명 있으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지만, .....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는 이 얼마나 추악한 모습이었나. 내 마음 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피로 얼룩진 희생은, 그분이 이 땅에 인간으로써 겪어야 했던 가난함과 고통과 괴로움, 피곤함, 배고픔, 모욕과 수난은, 사라져 있었다. 아아... 이 더럽고 더러운 자여. 은혜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딱 그 심정이었다. .... 내가 느낀 것은 감동이 결코 아니었다. 그 사람의 행적의, 그 사람의 거울을 통해 본 나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한 쪽 발목을 세상에 담근 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고 자위하는 위선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하는가. 얼마나 많이 진리를 왜곡하고 본질을 흐리는가. 겉으로는 독실한 척, 신령한 척, 믿음 좋은 척,  .. 척이란 척은 다 하고 다니지만 실상은 어떤가. 어떻게 감히!! 주님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 안에서, 거짓된 모습을 가장한 채, 고개를 뻣뻣히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건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어떤 권위를 힘입어서?! 어떻게 진실된 종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슬람에서는 그 알라를 향해 머리를 땅에 대고 경배하며, 불교에서도 부처상을 향해서 백번이고 천번이고 머리를 땅에 까지 닿는 절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나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고개를 뻣뻣히 쳐들고 머리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찬양을 부르고 대표기도가 너무 오래한다고 불평하고 다닌다. 그러면서 주를 진실되게 믿는 사람들을 향해 '광신도'라며 손가락질하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자기의 좁아터진 식견이 전부라고 믿고 함부러 다른 이들을 판단한다.

 

 

 

... 이 책을 읽는 동안, 감동을 느끼길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묵묵히 걸어간 저 최춘선 할아버지의 모습을 거울로 삼아, 이제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이켜 볼 때다. 변화할 때다. 무엇보다도 나 부터가, 그리고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그리고 이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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