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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과 새침데기
데보라 시먼스 지음, 이지수 옮김 / 신영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의 주인공 중에서 남주인공은 정말 로맨스소설에는 드믄 성격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의 남주는, 거의 한두가지 성격으로 요약된다. 흔히 카리스마 남주라고 불리우는, 엄청나게 강한 성격의 남주로서 남성적 매력이 폴폴 풍기고 끝내주게 멋진 외모에다가, 심심하면 으르렁거리고 살기를 피워낸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와는 정 반대의 인물, 여자에게 계속 끌려다니는 약한 성격의 주인공이다. 전자나 후자나 꾸며진 성격이라는 것이 드러날 정도로 비현실적이어서, 재밌게 보고 멋있긴 하지만 그다지 공감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의 남주, 랠리는 다르다. 보는 내내 정말 감탄하면서 봤기 때문에 다소 과장이나 지나친 미화가 섞여 있더라도 양해 바란다.
제목이 악당이니까 아마도 랠리를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랠리는 전혀 악당이 아니다. 아마도 제인이 보는 시점에서의 악당이지만, 이렇게 착하고 예의바른 악당 봤나? 랠리, 이 글의 남주는 순하고 착하다. 잘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성적인 매력이 풍겨오는 것은 당근 기본이다. 약간 유약하고 자신감 없고 겉모습에 지나치게 신경스는 게 흠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흠잡을 데 전혀 없는 외모의 남자가 어딘가 어리숙하고 기죽어 있는 모습은, 뭐랄까.. 모성본능 자극한다. 그리고 매치 안되는 부드러원 말투와 유연함과 쾌활함이라니! (대다수의 로맨스소설의 남주 역시 부드러운 말투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 위협이나 가장, 그리고 무심함과 냉정함이 숨어있기 마련이지만, 랠리는 그렇지 않다!) 느물거리는 것이 아니라 쾌활하다. 거기다 상냥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화내는 법이 없다. 상대방이 아무리 자기를 긁어대도 어깨를 으쓱거리고 유머를 흘릴 뿐,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글 속에서의 랠리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유머를 선택했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다. 제인이 중간에 자기를 모독하는 장면이 나오지만(설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흔히들 일어나는 살기라든지 눈이 엄청나게 날카로워져서 여주인공에게 보복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상처는 받았지만, 그것을 그냥 넘어가고, 오히려 제인의 비명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다. 선량한 랠리녀석! 이 별명이 정말 딱 맞는다.
흔히 완벽한 외모의 남주에게서 보이는 번뜩이는 눈빛, 죽일 것 같은 기세, 바드득 이를 간다든지, 강제로 여자의 입술을 뺏는다든지, 상처받은 야수같은 모습은 없다. 화는 나지만 그 뿐, 오히려 한줌거리도 안될 상대에게 겁을 먹는다. 겁을 먹다니! 한심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스럽지 않은가? 이렇게 선량한 인물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조심스러워하고 다가서는 것을 주저한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완고하고 딱딱하고 엄격한 부모가 있었지만, 그는 증오심이나 반항심 같은 것은 키우지도 않았다. 더구나 유머로 자신을 지키긴 하지만,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그것을 애써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고통에서 신경을 끄고 넘겨버려서 진심으로 상처받지 않는다. 설혹 그랬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성격을 변하게 할 정도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표시할 정도로는 아니다.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되지 않은 오해로 미쳐 날뛰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류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을 그리 받으면 자라지도 않았는데도 무심함과 새침함으로 가장한 상대의 호의를 읽을 줄 알고, 안 그래도 부드러운데다가 벌꿀처럼 달콤해지기 까지 한다. 세상에 이런 남주라니! 이렇게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인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감탄할 성격이 아닌데도, 감탄을 하게 되 버린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난 아무래 보고 또 봐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 랠리라는 인물은.
놀만큼 놀았으면서도 그 내면은 정말 순진무구한 소년, 사랑에 빠진 어린아이인 동시에 최고의 매너를 갖춘 신사, 말릴 수 없는 장난끼 그득한 개구장이, 벌꿀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년, 동시에 폭발할 것 같은 남성미 넘치는 남자, 유약하고 자신감 없는 소심한 소년이다. 이 말도 안되는 조합이 이렇게 멋지게 어울린 인물은 본 기억이 없다.
여주인공, 제인은 평범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언니와의 비교로 인해 아예 어릴 때부터 꾸미고자하는 아름답고자 하는 노력조차 포기하고 대신에 지성과 날카로운 입담을 무기로 삼은 여자, 처음에는 랠리를 경멸하지만 차츰 그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존경하게 되고 그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름다워진다. 충동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어서 말 실수도 많이 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다 솔직히 시인하는 점이 그녀의 장점이다. 그녀의 영혼 또한 그늘이 없다. 조금 엇나갔을 뿐 기본 자체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이 글의 남주, 랠리는 그런 그녀의 순수함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또한 그녀로 인해 쪼잔하기까지한 외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멋지긴 했으나, 미성숙했던 소년이 사랑으로 인해서 진정한 남자가 된다고나 할까?
이 글의 뒷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들.. 난 이 책을 사랑한다. 라고 말이다. 정말 나도 같이 말하고 싶다. 과장되지 않은(물론 다소의 과장은 있다. 어디까지나 로맨스소설이 아닌가. 미남미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물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공들여 묘사된 랠리라는 남주인공, 어찌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으랴. 이렇게 재밌고 매력적인 글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