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고무신 하나로 일어섰다가 군바리 정권에 의해 해체되었던 국제상사의 '왕자표', 노란색 번개 로고가 비교우위의 세련미를 자랑했던 ' 타이거', 단어 조합부터 어색한 것이 그 제품명만으로도 충분히 80년대스러웠던 '프로월드컵', 그외 제품명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따로 없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은 말표와 범표의 각종 운동화들… 그 춘추전국의 운동화 시장을 일거에 평정한 80년대 최강의 스니커즈이자 당시 10대들의 뇌리에 근대적 브랜드의 개념을 최초로 각인시켰으며 동네 양아치들로 하여금 돈이 아니라 이 신발을 삥뜯게 함으로써 10대 또래 커뮤니티 내에서 운동화를 유사화폐의 지위로까지 격상시켰던 당대의 명품, 나이키.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아니라 신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고, 그래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계급의 문제이기까지 했던 이 명품을 신을 수 있었던 사람이 한 반에 한 두 명이 고작이었던 80년대 초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가는 버스 계단에 올라서는 내 눈에 복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발 사이로 누군가의 하얀 고무신 하나가 눈에 걸렸다. 고무신이 여전히 드물지 않은 시절이긴 했어도 적어도 통학버스에 탄 학생 중에 하얀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란 그전에도 그후에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지라 계단을 올라서며 목을 빼고 그 주인을 확인했다. 그는 멀쩡한 인근 고등학교의 상급생이었다. 의아했다. 돈이 없어 운동화 한 켤레도 못 사 신었다고 생각하기엔 그 행색이 너무 멀쩡했고, 단순한 개인적인 선호로 보기에 고무신은, 너무 얇고 잘 벗겨져 학교 생활에 영 적합하지 않은 신발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일이었기에 일부러 사람들을 헤치고 그 사람 뒤에 가서 섰다. 바로 뒤에 서서 고무신을 다시 한번 내려다 본 난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고무신에 너무도 선명하게 붙어 있던 그 날렵한 로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 자조적으로 자기 신발에 그려 넣던 볼펜 버전도 아니요, 나이스나 나이카 등의 유사제품에서 떼어낸 짜가 버전도 아닌 진짜 나이키 로고가, 진품만이 낼 수 있는 그 질겅한 소가죽 질감을 내뿜으며 고무신의 옆구리에 떡 하니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카타르시스란..

 

명품족

 

'명품족'이 출현했다. 몇 달이고 돈을 모으며 기다려서라도 아르마니, 페레가모,루이비통 등 자신이 원하는 특정 명품 브랜드의 특정 상품을 반드시 구입하고야 마는 부류로, 과거 '내 돈 내가 쓴다는데…' 류의 부유층 과소비와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혹자는 고가의 명품을 소비함으로써 귀족과의 동일시를 꾀하는 미국의 여피, L-제너레이션(Luxury Generation)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여피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를 뜻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엄밀하게 말해 우리네 명품족은 L-제너레이션과도 구분된다. 우리네 명품족은 소득 수준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돈 없으면 계라도 든다.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기성의 눈길은 당연히 곱지 않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 규범과 '국산품 애용'과 '한방울의 물도 아껴 쓰자'는 절약 캠페인에 익숙한 기성의 세대에게 이런 명품소비는 필요 이상을 가지려 하는 과소비이며 분수를 모르는 사치풍조이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불건전한 소비의식인 게다. 해서 언론은 이 현상을 질타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명품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구를, 유사한 품질과 기능을 갖춘 훨씬 저렴한 다른 상품을 두고서 굳이 고가품을 선택하는 사치와 허영으로만 해석하고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이들 명품족을 사회적으로 계도하거나 도덕적으로 계몽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1차원적 접근일 뿐 아니라, 성공할 리 없다.

 

다이아몬드가 보석인 이유가 그 돌에 내재된 자연가치에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있지 않다. 이들에게 명품 소비는 실용적 필요에 의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구하는 정신활동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명품은 자신의 미감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이고, 라이프 스타일의 차별을 선언하는 구별 표식이며,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신분증명이고,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또 스스로 타인을 이해해내는 소통매개다. 정체성 소구에 과소비란 없다. 적합하며 부적합하냐가 있을 뿐.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딱이라고 여겨지는 명품 하나에 그만큼이나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들 명품족을 근검절약, 국산품애용 등의 규범으로 재단할 생각이 없다. 보라! 문화자본이 '구별짓기'를 통해 어떻게 '계급'을 재생산해내고 있는지를!, 이라며 흥분할 생각도 없고, 종교인들이 그 명품소비에서 유사물신숭배의 혐의를 발견했다며 경악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열등감과 보상심리를 뿌리로 하는 집단 콤플렉스의 발현이라며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해석도 일리가 있으나, 명품의 지명도와 품격을 빌어 자신의 정체성 소구행위를 보조받고자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의 이 존재론적 욕구는 결코 정상, 비정상으로 나눌 일이 아니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품만큼 다종다양하게 개인의 정서적, 문화적, 사회적 취향을 반영해내는 물적 구현이 또 얼마나 더 있는가 말이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그러니까 명품이 지금 그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는 정신적 서비스를 대신 할 뭔가를, 우리 사회가 충분히 제공할 수 있고서야 비로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거다. 그런데, 그런 명품의 역할을 대신할 만한 감성과 권위를 가진 문화적 아이콘이 우리 사회에는 거의 없다. 문제로 따지면 그게 훨씬 더 문제다. 명품 집착을 탓하기 전에, 그만한 걸 못 가진 우리 사회부터 되돌아 볼 일인 게다.

 

짝퉁

 

그러나. 작금의 명품족이 그런 명품들을 향유해내는 방식에는 이의가 있다. 명품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속되고 숭배하고 복종하는 자세에는 불만이 있다. 명품의 명성에 압도되어 찬양하고 감사하는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1년계를 들어 구입했던, 6개월을 못 먹고 장만을 했던, 일단 내 수중에 들어왔다면 복종하며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며 향유할 수는 없는 것인가. 원본, 진품, 정품을 존중은 하되, 때론 그 권위를 구성하는 상징체계를 내 맘대로 해체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모사, 모방하고 창조, 개선하여 나만의 것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는 것인가. 나이키 로고를 떼어내 하얀 고무신에 붙이는 것처럼, 내게 필요한 요소만 차용해 나만의 짝퉁을 재구성할 수는 없냐는 말이다.

 

존중하되 굴복하지 않는 문화적 상상력과 누리되 지배받지 않는 미적 감수성을 이 새로운 세대에게서 보고싶다는 말이다. 명성에 고개 숙이지 않고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내는 우리만의 짝퉁을 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명품의 도움을 받아 드러내고자 했던 자신의 정체가 명품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자신만의 짝퉁으로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그 짝퉁이 마침내 또 다른 명품이 되는 지경을 보고 싶다는 말이다.

 

나이키 고무신, 그게 다시 보고 싶다. 그 짝퉁 스피릿을…….

 

from 웹진 북키앙: http://bookian.yes24.com/20021215/writer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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