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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발큐리어스 10 - 완결
사치미 리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미라의 남성해방대작전이라는 만화가 있다. 현재의 아랍, 예전의 남자와 여자의 관념을 통째로 마치 거울에 비춘 듯 뒤바꾼 그런 이야기. 남자는 약하고 무기력하고 성적인 용도 외에는 쓸모없는 존재일 뿐, 여자는 강하고 의지있고 그 세계를 이끌어나간다.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그만큼 다루기가 어렵기에, 더욱이 이미라는 남성적인 힘있는 이야기보다는, 사랑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더 자질이 있는 터라, 남성해방대작전은 9권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 남성해방대작전이 나오기 힘든 이유는, 여주인공의 성격에 있다. 강하긴 하지만, 이미라가 그려왔던 수많은 여자주인공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그런 평범한 여성. 고대,중세,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핍박당하는 남성들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결국,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다. 힘이 있어야 목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 그 만화에서는 남자주인공도 여자주인공도 그 힘이 부족하고, 그랬기에 이야기가 더이상 진행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돌아와서, 이 은의 발큐어리스는 남성해방대작전과 맥을 같이 한다. 힘이 세니까 부려먹기 좋고, 씨를 줄 뿐인, 쓸모없으면 그냥 버려버리는 그런 존재가 남성이다. 이 은의 발큐어리스의 여자주인공은 평범하다. 남성해방대작전의 여주인공처럼, 아니 오히려 더 약해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녀는, 전설적인, 최고의 능력을 가진 '기사'. 여자들로 이루어진 그 세계에서도 보기 드믄 진정한 '영웅'이다.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어야하는 법. 갈등은 그녀는 평범하게 있고 싶어하지만, 그녀를 동경했고 그랬기에 증오하는 '여왕'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자극됨으로써 여주인공은 더 강해져간다. 남자주인공 역시 얼굴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굉장한 초능력을 가진 존재에다, 여성에 대한 강한 증오를 품고 있다.
은의 발큐어리스에는 '힘'이 있다. 그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힘. 남성해방대작전이란 만화는, 좀 더 근원적인,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하다 힘에 부쳐 주저앉았지만, 이 만화에서는 충실하게 '영웅'의 전개를 따라간다.
그래서 재밌다. 전형적이지만, 그 약해보이는 여주인공이 기적을 일으킬때, 전형적이고 뻔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소름이 돋게 하는 희열이 있다.
'사랑'때문에 모든 것이 일어났고 뒤틀렸다는, 지극히 순정만화적인 공식은 그대로 놔둔채, 그 이상의 재미를 보여준다. 요새는 볼 수 없는 신일숙 작가의 만화처럼, 애정만이 아닌 다른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작품. 신일숙은 스토리도, 그림체도 좋지만, 그림체가 다소 경직되어 살아숨쉬는 힘을 느낄 수 없는 반면, 이 은의 발큐리어스같은 단순한 그림체는, 묘하게 숨결이 느껴진다. 더 자유롭다.
정말로 좋아하는 만화, 좋아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