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 역사 분쟁 · 무역 전쟁 · 이념 갈등 차이나는 클라스 4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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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클라스> 일명 차클은 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요즘 많이 시도되는 예능+교양+강의를 합친 포맷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차클 시리즈는 꾸준히 책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그동안은 국가나 법, 리더, 역사, 고전, 인류, 사회, 과학, 문학 등 조금은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면 그 중에서 현재와도 연결되는 구체적인 외교와 국제관계 관련된 쟁점만을 뽑아서 정리한 게 바로 시리즈의 4번째, 국제정치 편입니다.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안들이 많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어요!

지피지피 백전불태
 아무래도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관련한 꼭지를 먼저 읽게 되더라고요. 특히 일본의 경우 한국 근현대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잖아요. 자료도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고요. 경술국치부터 시작해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독도와 위안부 문제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가 많아서 엄청 쉽게 잘 읽혔습니다. 특히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증거에 기반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방침으로 여러 자료를 하나하나 짚어주시는 게 좋았어요.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독도는 한국 땅이야!' 하고 말하는 데서 멈추고 그 다음 뒤따라오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소홀히 하는 게 현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일본이 우긴다고 비난하지만, 제대로 증거와 논리를 갖추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면 외부에서 볼 때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 차이가 없게 보일 거예요. 국민 한 명 한 명이 좀 더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에 뼛 속 깊이 동감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중국! 저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막연하게 인구를 무기로 한 대국, 떠오르는 신흥강자, 천안문과 홍콩 사태로 대표되는 독재권력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40여전 한국이 겪었던 독재의 진통을 지금 겪고 있구나, 그런 감상이랄까요? 그런데 도대체 왜 동북공정을 시작했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시스템이 어떻게 되고 무엇이 목표이며 지금 어떤 국가적 전략을 취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니까.. 엄청 무서워졌어요. 결코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우리나라는 우리가 당사자인 동북 공정만 알고 있지만, 알고 보니 서북공정/북방공정/남방공정/서남공정 등 온갖 경계에서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진행중이잖아요! 동북공정에서 물러서면 아마 다른 곳에서도 물러날 빌미가 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지 않을까요? 설령 자기들이 하는 짓이 틀렸다는 걸 알아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구나 싶어서 보는데 절로 한숨이 나오더라구요ㅠ

 하나의 중국이라는 대의를 가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요. 하지만 소수민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꿀까 두려워 미리미리 억압하고 역사를 왜곡하다니; 선후관계가 잘못된 느낌입니다. 그렇게 끝없이 탄압을 하니 소수민족이 더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온갖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뒤섞이는 게 어찌 보면 중국의 가장 큰 강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독립의 가능성을 의식하고 예방하려다 보니 오히려 패권주의적인 느낌이 너무 강해져 버렸어요. 물론 중국은 항상 강국이었고, 근현대사에서 잠깐 주저앉은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강국이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미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타격을 좀 입긴 했지만 호언장담한 대로 아마 2035년 쯤에는 부유사회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모든 걸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계속 고수한다면 (100% 그러겠죠) 한국은 물론이고 주변 모든 나라와 계속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 독도에 관해 일본인과 지리멸렬한 싸움을 하듯이 고구려에 대해 중국인과 싸워야 할 거예요. 개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독도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주장 대신 우리 말을 뒷받침해 줄 증거를 하나하나 꿰뚫고 있는 것 뿐일 겁니다. 책에서 지적한 대로 국가 차원에서 북한과 연계해 학술적인 증거를 마련해도 좋을 것 같아요.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주변의 익숙한 국가에 대한 꼭지는 '알고 있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논의해본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란이나 독일 관련한 꼭지는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는 잘 모르는 곳을 살펴본다'는 느낌이에요. 특히 이란에 관한 꼭지를 읽으면서 국제적인 뉴스에 무심했던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라고 했을 때 이란과 이라크를 제대로 구분하고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지 전혀 설명할 수 없었거든요. 사담 후세인이나 이라크 파병 같은 단편적인 소식만 드문드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란이 겪어야만 했던 온갖 정치적 진통이 우리나라 근현대사랑 겹쳐지는 느낌이라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어요. 특히 자기 잇속만 챙기며 국민은 굶어죽어도 나 몰라라 하는 왕조 아래에서 고통받고, 국가를 위해 개혁을 감행한 국민적 영웅을 외국의 농간으로 잃고, 이웃 독재국가와의 전쟁에 서방 국가들이 일방적으로 화학 무기를 지원하고,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엔 미국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이란인이 어떻게 미국을 싫어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진짜 이란에서 일어난 일만 보면 미국이 악의 축 그 자체처럼 보일 지경이에요;;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까, 중동 지역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느껴져서 아찔했어요.

 독일의 경우는 좀 다른데, 빌리 브란트로 대표되는 개혁의 세대 이야기가 정말..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개혁이 가능했던, 이런 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세대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무슨 환상 같다니까요! 68혁명이 유럽과 미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라는 인상이 강했거든요. 어쨌든 그 다음 세대에서는 68혁명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잖아요. 그 특유의 히피스러운 모습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정치권에 아주 분명하게 영향을 줬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부럽기도 했고요. "민주주의를 감행해보자"라니, 정치 구호인데도 어쩜 저렇게 강압스럽지 않고 사려깊은 느낌을 주는지! "교양 사회"라는 목표는 또 어떤가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모든 국가의 이상향 아닐까요! 실제로 대의를 위한 정치를 하고 그게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완전히 새로운 국가가 된다는 게.. 너무 꿈 같은 일이에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라는 게 엄청난 의욕과 설렘을 줍니다. 누군가는 해냈잖아요. 다음 차례가 우리일지 그 누가 알겠어요.

 역사는 단순히 거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맥락을 가지고 현재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역사를 안다는 건 결국 현재를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뿅 하고 솟아난 국가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원인을 알면 그에 따른 대응이나 해답도 알 수 있을 겁니다. 해열제를 써야 할 곳에 복통약을 쓰면 안 되지 않겠어요?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든 걸음에는 후폭풍이 따릅니다. 온갖 스트롱맨으로 둘러싸인 지금, 대의와 실익을 동시에 챙기려는 노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일본이나 중국, 미국과의 관계에서 전략을 고민한다면, 이란이나 중동 문제로 균형을 그리고 독일을 보면서는 쇄신을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영상보다는 텍스트 쪽이 훨씬 더 정보전달에 영양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어서, 분명 다 합치면 열댓 시간이 될 법한 강연이 손을 뻗으면 언제든 원하는 부분을 빠르게 찾아볼 수 있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온 게 정말 만족스럽네요! 강연자의 전문성이나 주장하는 내용도 합리적이고 깔끔해서, 다른 주제 관련해서도 계속 차클에서 시리즈가 꾸준히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다른 분들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도 있는데, 코팅된 듯이 만지면 매끄러운 종이 촉감도 저한테는 몹시 플러스 요소였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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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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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글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싫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최대한 스포 없이 후기를 써보려고 했지만, 대놓고 반전이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후기를 읽다보면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눈치챌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아무리 '범인이 XX다!'라고 하지 않으면 뭐하겠습니까? 후기를 읽다가 한순간이라도 '엇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런 식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반의 반으로 줄어들게 될 게 뻔한데요ㅠ 아무것도 모르고 소설을 읽고 놀라고 싶으신 분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본 신본격파 미스터리 대표작

 일본 미스터리 추리 소설에는 몇 가지 계열이 존재합니다. 문학파, 사회파, 본격파, 하드보일드, 일상 미스터리, 코지 미스터리 등 워낙에 미스터리 장르가 발달한 나라이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세부 장르 역시 골고루 발달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요리코를 위해>를 쓴 노리즈키 린타로의 경우 본격파를 이은 신본격파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입니다. 신본격파 미스터리란 고전 소설에서 자주 쓰이던 사건-탐정-트릭-진상을 중요시하는 미스터리 장르에요. 사건이 있고, 범인이 있고, 그 범인은 교묘하고 놀라운 트릭을 사용했으며, 탐정 격인 인물이 그 트릭을 간파하고 진상을 파헤치는 게 기본 구조죠. 어릴 적에 자주 보시던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구성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요리코를 위해>는 1장에서부터 아예 범인인 아버지의 수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살해당하자 아버지는 분노하고, 경찰이 해주지 못한 복수를 자기 손으로 해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떻게 딸의 살해범을 논리적으로 추론했고 어떻게 확인했으며 어떻게 살해했는지 매우 상세하게 묘사해요. 모든 것이 다 착착 맞아 떨어지고, 딸의 복수를 끝마친 아버지는 살인자가 된 자신을 벌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집에 드나들던 간병인이 자살시도를 일찍 발견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거예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1) 사건과 관련된 주요 정보를 숨기고 있었으며 헛발질만 했던 경찰 2) 추문을 피하기 위해 경찰에 압력을 넣은 학교 3) 학교와 유기적으로 엮여 있어서 혹시나 타격을 입을까 전전긍긍하는 정치권 같은 외부 권력들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노리즈키 린타로에게 의뢰가 오게 됩니다. 진상을 밝혀달라고 고용된 게 아니에요.


 덕분에 무지몽매한 대중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을 언론에서 본 것만으로도 즉시 이렇게 믿게 되지. 아아, 이 사건에는 뭔가 괴상망측하고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저 명탐정이 굳이 나설 이유가 없잖아, 하고. 물론 그런 믿음 따윈 아무 근거 없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p.98)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캔들 무마용으로 윗분들이 급하게 고른 병졸이 우리의 탐정이었다 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리즈키 린타로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윗분들의 입맛에 맞는 일만 하지는 않지만요.


 일종의 서술 트릭입니다. 후기에 이 단어를 쓸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요. 서술 트릭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때론 모든 진상이 손쉽게 드러나니까요.  하지만 책 뒷표지와 짧은 소개글에서부터가 이미 스포의 시작이기 때문에.. 서술 트릭은 서막에 불과하거든요. 작품 내내 '아버지의 수기는 뭔가 믿을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싶더라고요.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차단된 클로즈드 서클에서 제일 처음에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 뭐 그런 법칙처럼 모두가 다 아는 거잖아요ㅋㅋㅋ 아마 수기에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한 독자들도 계속해서 탐정이 뭔가 걸린다, 이상하다고 하는 순간 '도대체 아버지는 수기에서 뭘 감추고 있을까?' 하고 되돌아보게 될 겁니다.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한정적인 편이라 읽다보면 범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도 보이고요. 하지만 도대체 어떤 트릭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게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이죠! 놀랍고 참신한 속임수를 두고 범인과 탐정&독자가 한 판 두뇌싸움을 벌이는 거요~ 사건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고 해도, 도대체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탐정이 밝혀내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니까요ㅎㅎ 


 


한 사람을 위한 마음

 1989년을 배경으로 한 십수년 전의 작품인 만큼 지금 보면 상당히 위화감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같으면 바로 뱃 속의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DNA 검사로 바로 알아내겠죠. 특히 미성년자 여성이 임신을 한 채 살해당했다면 범인이 아이 아버지일 가능성이 몹시 높으니까 가족이 원하지 않아도 검사가 필수적으로 진행될 겁니다. 하지만 일본의 80년대 후반, 일본이 한국보다 10여년 앞선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 후반쯤 되겠죠? 이때는 임신을 했다는 걸 아는 게 고작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 아버지를 추려내는 방식 자체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거든요. 논리적인 추론으로 후보를 하나하나 좁혀나가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이라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잖아요. 프로파일 비스무리 하긴 한데 정확도가 좀 떨어져요; 물론 그 덕에 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거지만요. 요즘 같았으면 어림도 없어요~ 시작 전에 다 들통나요~


 약간 뒤틀린 관계가 메인이 되는데 이게 좀.. 일본스러운 감성이다 싶기도 합니다. 아니, 한국에 이런 병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한국과는 꽤 다른 양상이에요. 가족관계나 종교, 불륜이나 정치권 같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기저에 깔린 정서가 한국과 많이 달라요. 제가 특히 신기하게 보는 건 '여고생'에 대한 감각입니다. 실제로 여고시절을 지나왔던, 그리고 지금도 주변에서 여고생을 보곤 하는 사람으로서 일본 창작물의 여고생은 실존하는 특정 계층이라기보다 '클로즈드 서클'처럼 창작물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 인간들이라는 느낌이에요. 환상이 지나쳐서 숭배와 혐오를 동시에 하는 느낌인데, 이 위화감은 제가 한국+여성 독자라서 느끼는 거일지도 모르겠어요.


 트릭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프로 작가로 데뷔하기 전 대학교 미스터리 서클 아마추어 시절에 습작한 작품에서 구상한 아이디어라는데, 정말 대단해요! 본격 미스터리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작가가 똑똑한 만큼만 범인이 똑똑하잖아요. 게다가 물론 범인과 트릭이 중요하고 그걸 위한 미스터리지만, 그 외에도 인물들의 뒤틀린 관계가 강하게 인상에 남습니다. 보통 본격 미스터리는 오로지 논리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라는 느낌이 있어서 뒷맛이 깔끔한 편인데 이 작품은.. 진상이 좀 참혹해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씁쓸해요. 결국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에서 시작된 불행이 가족 모두를 덮쳐 일가족 모두를 망쳐버렸다 싶거든요.  


 <요리코를 위해>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에는 요리코를 잃고 복수를 향해 폭주하는 아버지의 심경처럼 들리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심경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남겨진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요리코만 신경쓸 수가 없는 거죠. 오로지 린타로만이 딱 요리코만을, 피해자만을, 그 여자아이만을 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탐정이나 경찰에게 필요한 소양입니다. 변명도 하소연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이미 목소리를 잃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목소리를 내는 일이요.'산 사람은 살아야지' 같은 멘트는 죽은 사람에게 너무 부당하잖아요. 요리코는 누군가는 자기를 대변해서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을 거예요.


 

 워낙에 유명한 작품인 만큼 이미 읽으실 분들은 다들 읽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미스터리를 사랑한다 하시는 분 중에 아직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무더운 여름밤 이 책과 함께하시면 어떨까요? 덮고나면 조금은 서늘해질 지도 몰라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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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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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성실한 생활인 탐정 

일본에서 미야베 미유키 현대물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리즈인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어요~ 사건과는 완전 거리가 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던 40대의 남성이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들게 되면서 서서히 탐정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돋보이는 연작입니다. <누군가>와 <이름 없는 독>까지는 그야말로 사건 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월급쟁이 외부인, 초짜 느낌이 팍팍 났다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희망장>에서 몇 개의 변곡점을 거쳐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서는 이제 사무소까지 차리고 제법 탐정다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어요.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과거에 비하면 정말로 일취월장! 


 이 탐정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평범함입니다. 소박하고, 성실하고, 상식적이고, 정직하고, 예의바르고, 다정한 생활인이라는 느낌? 직장 상사로 만나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인물이거든요. 절대로 공사를 섞지 않고,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여차할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정말 귀하잖아요! 사실 그러다보니 너무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가끔 소심해보이기도 하고, 야망 같은 건 약에 쓸래도 없고, 거침없이 톡 쏘는 매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진중한 사람이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주변의 고민을 차분히 듣고 해결해준다는 큰 틀이 정말 맘에 들어요. 게다가 사회파 거장인 미야베 미유키 작가답게, 작은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에도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하나씩 숨어있거든요. 사건은 작지만 고뇌는 깊다, 스기무라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죠!


 스기무라는 처음부터 엄청나게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사건은 맡지 않아요. 당연하죠. 이제는 어엿한 사무소를 가진 탐정이라고 해도, 경찰이나 검찰 혹은 뒷세계 출신도 아니고 누가 봐도 샐러리맨에 가까운 남자인 걸요. 주로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지인의 지인들이나 찾아오는 작고 별 유명세 없는 탐정에게, 갑자기 불쑥 나타나 "제 친구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떡하죠?" 같은 엄청난 소리를 가져오는 의뢰인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대신 대체로 뭔가 수상쩍긴 한데 사건까지는 아닐 것 같은, 그런데 내 힘으로는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누가 좀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경우가 많아요.


여기 분명한 조짐이 있다

  경찰은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나설 수 있지요. 하지만 탐정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주변에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한데' 하는 의혹만 가져도 제 3자의 일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의 권한이나 범위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요. 그렇다보니 탐정의 눈으로 의뢰를 쫓아가다보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조짐을 몇 번이나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언제든 극단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하는 기분 나쁜 냄새. 저는 스기무라가 그런 냄새를 자꾸 맡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사건에 대한 언론의 뒷북식 기사를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일이 벌어진 후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합니까? 하지만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아주 가까운 인물들도 '설마'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4편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장편이 아니라 중단편 연작입니다. 「절대영도」, 「화촉」, 그리고 표제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총 3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네요. 공통점을 찾자면 홍보 띠지에 씌인 것처럼 조금 곤란한 상황에 빠진 여자들이 나온다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사위에 의해 딸과의 모든 연락이 차단된 어머니, 결혼식 당일에 현장에서 파혼을 맞은 신부, 끊임없이 주변에 클레임을 걸고 문제를 일으키는 요주의 모녀. 하지만 모든 사건의 뒤에 여성을 경멸하는 최악의 남자들이 버티고 서 있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여자를 남자의 아래로 보는, 여자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여자에게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사회 전체가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절대영도」 가 대표적입니다. 딸을 감금(?)하고 딸과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있는 사위를 뒤쫓다보니 사위가 대학부터 쭉 몸담고 있는 하키 운동부가 나옵니다. 조사해보니 꽤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자 선배가 나오고, 그 선배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추종자들과 어영부영 끌려간 후배들이 나오고, 뒷풀이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여자친구나 부인은 호스티스처럼 웃으면서 술을 따라야만 하는 가부장적 여혐 문화가 나오죠. 다른 여자를 끌어오라고 후배들의 여자친구를 압박한 흔적도 여실합니다. 연락도 잘 닿지 않는 외지의 별장에 거짓으로 여자 하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운동 좀 했다 하는 남자들- 세상 어떤 여자가 여기에 기꺼이 초대받아 가고 싶어하겠어요? 너무나, 너무나 위험한 냄새가 나잖아요. 


웃기지 마. 여자 주제에 건방져. 그런 태도가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 p.143


 강압과 진상에 가까운 지분거림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후배의 여자친구의 친구에게 이런 문자를 날리는 남자. 여자 주제에, 후배 주제에 하면서 거들먹거리며 비열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남자.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경찰이나 언론에 제보할 수 없어요.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설령 저 남자가 스토킹을 했다고 해도,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은 정말! 너무! 말도 안 되게! 약해서 아마 벌금형도 받지 않고 집행유예나 기소유예 정도로 끝날 게 뻔합니다. 그 후에는? 저 남자에게 보복성 범죄를 당할까 벌벌 떨면서 살아야겠죠. 바로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이건 처벌할 가치가 없는 가벼운 일이라고 딱지를 붙인 행동들 사이에서 파국은 싹틉니다. 


 뻔히 보이는 어떤 조짐.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내면의 경고등.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외부에 공론화시키고 호소하기에는 미약한 상황 증거. 여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말이 눈앞까지 다가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그 폭탄을 개인적인 선에서 피할 수 있을 뿐입니다. 파국이 우리를 잡아먹기 전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 그게 개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게 정말 최선이어야 할까?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바로 이런 사회파 미스터리의 역할이겠죠.


우리는 비극을 어디에서 막을 수 있을까

 「절대영도」 는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폭탄을 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아버린 사람과 그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악을 피하지 못했던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몇날 몇일을 언론에서 떠들어댈 만큼 큰 일이었기에, 작품 내에서의 여파도 상당합니다. 그렇게 짙은 어둠 속에 있던 사건으로 시작해서인지 두번째 사건 「화촉」은 갑자기 너무 작은 의뢰로 넘어가서 당혹스러운 감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살인과 강간, 폭행과 학대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없는 대신 오히려 스기무라 탐정이 더 직접적으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약간의 호의를 베품으로써 너무나 뻔히 보이는 불행한 결혼을 두 개나 막은 셈이니까요.

 

 스기무라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지만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쓰이는' 오지랖을 부린 최고봉이 아마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일 겁니다. 거절하라고 분명히 경고를 받았고 본인도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딸인 모모코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제멋대로인 엄마한테 끌려와 기가 죽어 있으니 그게 신경이 쓰여 차마 거절하지 못한 의뢰죠.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억지였기 때문에 깔끔하게 딱 조사를 끝내서 더 이상 우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목적이었고, 당초 예정대로 조용히 해결될 뻔 하였으나 늘 그렇듯(...) 일이 커지고 말았던 케이스입니다. 그래도 스기무라처럼 감이 좋은 외부인이 끼어든 덕에 더 망가질 뻔한 레일을 달리지 못하게 멈춰둘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스기무라는 자기 보고서가 일을 불러왔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죄책감을 가지고 괴로워하지만, 경찰이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꽤나 적극적으로 개입해 최악을 막아준 모양새입니다. 다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외부에서 개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죠. 그 '한계'라는 게 한국이나 일본 사회처럼 가족 문제에 배타적인 문화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느껴지고요. 여기서 스기무라가 하고 있는 고민을 독자 역시 똑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정말 예외적인 특수한 상황일까? 이런 사람들이 언론에서 쏟아내는 범죄 기사 뒷면에 훨씬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을까? 혼자서 참고, 참고, 참고, 참던 사람들이 부러지기 전에 막아줄 수는 없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테시나 고로 경위가 스기무라에게 던진 한 마디는 독자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격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도 정신 바짝 차리고 힘내요, 탐정님 - p.462


 세상에는 슬프고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가득하니, 그 고통을 어떻게든 덜어내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더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앞을 볼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부디, 정신을 바짝 차리시길. 그리고 우리 함께 이 아수라장에서 천천히 빠져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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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김 부장 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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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은 각자 다른 직업과 직위를 가진 6명의 여성 회사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고충이나 소회를 풀어낸 책입니다. 아무래도 여성 조직원들은 남성 조직원들은 받지 않는 여러 압박을 받는 데다 롤모델도 별로 없다 보니 막막할 때가 있잖아요? 거기에 '너 혼자가 아니다! 우리도 여기 있어! 다함께 버텨보자!' 하고 으쌰으쌰 하는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일종의 처세물입니다. 대기업 부장부터 프리랜서 작가까지 다양한 직종의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총 6장, 각자 다른 소주제로 묶여있고 각자 한 꼭지씩 맡아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이라 약간 수다 떠는 느낌의 구성이에요. 특히 각 장의 마지막은 사연을 받고 거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같이 토의하는 방식인데 여기가 특히 좋습니다. 왜냐면 그 전까지는 부장은 부장대로, 과장은 과장대로, 대리는 대리대로, 사원은 사원대로,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대로.. 각자의 입장을 하나씩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거든요. 예를 들어 부장이 A라는 해결책을 권유하면 듣고 있던 대리나 차장이 그건 아닌 것 같다며 B는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회사생활에는 어차피 정답이 없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사연의 주인공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연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말이죠!


 4장 그 많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같은 경우는 사실 정부나 기업,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대책이 없는 이야기들이라서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남자들이 아이를 키우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이런 상상 사실 사회생활 하는 여자들이라면 전부 한번씩은 다 해봤을 거고, 차별적인 현실 인식은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는지라, 별 실효가 없게 느껴졌어요. 반대로 3장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같은 경우는 아주 구체적인 상황+아주 구체적인 조언을 해줘서 읽는 내내 도움이 엄청 많이 되더라고요. 골프나 술자리 없이도 사내 네트워킹을 하는 방법이라든지, 책임이 애매한 상황에서 타 부서와의 갈등을 조율하는 방법이라든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꼭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라든지. 


 3장 중에서도 「너무 안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이라는 꼭지에 정말 공감됐어요. 내용인 즉슨, 정말 너무너무 안 맞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사실 그 사람은 정말 '호의'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프리랜서인 본인은 자신이 필요하지도 않는 미팅도 꼬박꼬박 불러내고, 항상 진척을 체크하고, 개인 일정을 공유하고.. 이런 동료가 너무 스트레스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료는 자신은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도 그렇겠거니 생각해서 일부러 그랬던 것이라는 일화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래요. 동료의 무능이나 이간질 같은 부분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들, 예를 들어 연락이나 일정공유, 공사구분 같은 것들은 대개 성향 차이가 날 뿐인데 상대는 자신을 기준으로 두고 호의를 보인 경우가 많다는 걸 갈수록 깨닫게 됩니다. 내게 해줬으면 하는 걸 상대에게 해주는 거죠! '여우와 두루미의 식사' 정말 딱 들어맞는 비유입니다.


 사회 생활이라는 게 그렇듯 항상 비슷해 보이지만 또 각자가 놓인 처지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 책 하나로 모든 고민을 다 해결할 수는 없어요. 독자들도 그걸 기대하지는 않을 거구요. 이 책 역시 6명의 저자들이 각자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은 뒤 '내가 해보니까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 하는 대안 제시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현실에서 그런 대안을 제시할 롤모델이 너무나 적은 게 또 사실 아닙니까! 주변에 어느 순간 보면 터놓고 의논할 사람도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요. 때로는 조언해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을 제시해주는 것만으로도 조언은 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니.. 언슬조의 의의는 바로 그것 아닐까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수많은 여성 동지(?)들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버텨봅시다. 나도 당신도 언니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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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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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 마플>의 실사판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법의생태학자, 퍼트리샤 월트셔! 그녀는 꽃가루에 능통한 식물학자로 이름을 떨치다가, 어느 날 경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법의생태학의 세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녀가 지적했듯이 아직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물론 한국도 포함입니다) 그게 뭔지 제대로 모르지만요. 지문이나 DNA 같은 '범인도 주의하면 남기지 않을 수 있는' 흔적과 달리, 범인이나 피해자의 옷이나 차, 피부나 머리카락에 남은 생태학적 흔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 때문에 더욱 확고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했지만요.


 읽는 내내 정말 놀랍고 부러웠습니다. 이런 직업이, 이런 작업이 한국에서도 하루빨리 현장에 도입됐으면 좋겠어요! 범인이 자신이 묻힌 줄도 모르고,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증거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억울함이 사라지겠어요? 퍼트리샤의 책에 따르면, 특히 실종사건이나 강간사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더라구요. 강간의 경우 범인이 "우리가 성관계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합의하에 한 일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피해자의 몸에서 DNA가 검출된다 해도 별로 도움이 안 되잖아요. 성관계 자체는 인정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후의 진술이 엇갈릴 경우, 양 쪽의 몸에 묻은 생태학적 증거들을 채취해 대조해보면 누구의 진술이 맞는지 판가름이 나서 사건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범인은 감옥으로, 무고한 사람은 사회로, 피해자는 가족의 품으로!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혹은 잘못 기억할 수도 있죠. 관계자가 2명 이상일 때, 모두의 말이 맞는 경우는 오히려 굉장히 드물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의 진술에서 어떤 부분이 정확한 사실이고 어떤 부분은 오류인지 잡아내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잘못 기억하지도 않죠. 내가 장미덩쿨 근처에 있었다면 내 몸에 묻은 생태학적 증거는 장미덩쿨을 가리킬 겁니다. 반대로 내가 놀이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분수대 옆에 있었다고 우겨봤자, 내 몸의 증거들은 다른 말을 할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아니죠. 우리는 더 확실한 증거, 더 정확한 증거를 찾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영국 내에서도, 심지어 퍼트리샤가 이렇게 유명해진 지금까지도, 현장에서 생태학적 증거를 오염시키는 일은 상당히 흔한 것 같더라구요. 현장 경찰이나 부검의, 심지어는 다른 법의학자들까지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이걸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의아해하고 비웃는 경우도 많았대요. 물론 퍼트리샤는 신경 쓰지 않고 '피고 측 변호인이 똑똑하다면 무슨 질문을 할까?' 한 발 먼저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오염을 막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고, 장소나 사람을 특정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 노력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한 장르의 선구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외부로부터 거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해낼 수 있나 정말 놀라울 뿐이에요!


 게다가 생태학의 세계는 아직 무궁무진합니다. 제가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아주 어렴풋이 의심하긴 했지만) 사망 추정시간을 예상하는 데 너무나 변수가 많아서 아직까지 우리 과학으로는 유의미하게 특정을 짓기가 어렵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윌리엄 배스는 경찰로부터 사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밝혀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정작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는지 느끼고 '시체 농장'을 세웁니다. 과학자니까 데이터가 필요했던 거죠. 자연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환경과 변수 하에서 시체를 실제로 관찰하고 정말로 시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기록하는 겁니다. 이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실제 현실에서 발견되는 많은 시체들이 언제 죽었는지 더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고 있기도 하고, 유색인종과 여성의 비율이 턱없이 낮아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문제점도 있어요. 저만 해도 선뜻 제 시체를 기부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죽은 후에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선뜻 내키지는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데이터들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현실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더 널리 알려져서 저항감이 좀 들어들면 좋겠어요.


 중간에 몇 부분 문장이 어색한 게 있어요. 예를 들면 166페이지. "자생종 야생동물들도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이런 곳들을 나는 항상 이런 장소를 암울함과 파멸이 짙게 드리운 곳이라고 여겼다." 이런 곳들을/이런 장소를 하면서 같은 워딩이 두번이나 들어갑니다. 뒤에 하나는 빠져야 맞는 문장이겠죠? 193페이지는 약간 헷갈립니다. "당신의 심장은 뛰지 않고 폐는 숨을 쉬지 못하며 몸 전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를 퍼뜨린다." 여기서 몸 전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를 퍼뜨리는 주체가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아요. 아마 짐작하기로는 혈관이나 뇌가 들어가야 맞지 않은가 싶은데, 아니면 앞부분과 연결되어 폐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쉼표가 하나 들어가든지 아니면 주어가 하나 더 들어가든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건 사소한 부분이지만요.


 정말 모든 챕터 하나하나가 다 흥미로워요. 심지어 수사와는 관계없는 본인의 어릴 적 얘기조차도 그렇다니까요! 세계 제 2차 대전에 태어나 온몸에 화상을 입어 병치레로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던 소녀시절을 거쳐 지금 영국 최고의 법의생태학자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분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더라구요ㅋㅋㅋ 왕년에(?) CSI나 범죄수사 드라마를 즐겨보셨던 분들이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살인과 강간, 범죄와 수사, 증거와 재판, 죽음과 인간.. 이런 요소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즐거운 독서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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