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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평점 :
소박하고 성실한 생활인 탐정
일본에서 미야베 미유키 현대물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리즈인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어요~ 사건과는 완전 거리가 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던 40대의 남성이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들게 되면서 서서히 탐정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돋보이는 연작입니다. <누군가>와 <이름 없는 독>까지는 그야말로 사건 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월급쟁이 외부인, 초짜 느낌이 팍팍 났다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희망장>에서 몇 개의 변곡점을 거쳐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서는 이제 사무소까지 차리고 제법 탐정다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어요.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과거에 비하면 정말로 일취월장!
이 탐정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평범함입니다. 소박하고, 성실하고, 상식적이고, 정직하고, 예의바르고, 다정한 생활인이라는 느낌? 직장 상사로 만나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인물이거든요. 절대로 공사를 섞지 않고,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여차할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정말 귀하잖아요! 사실 그러다보니 너무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가끔 소심해보이기도 하고, 야망 같은 건 약에 쓸래도 없고, 거침없이 톡 쏘는 매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진중한 사람이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주변의 고민을 차분히 듣고 해결해준다는 큰 틀이 정말 맘에 들어요. 게다가 사회파 거장인 미야베 미유키 작가답게, 작은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에도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하나씩 숨어있거든요. 사건은 작지만 고뇌는 깊다, 스기무라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죠!
스기무라는 처음부터 엄청나게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사건은 맡지 않아요. 당연하죠. 이제는 어엿한 사무소를 가진 탐정이라고 해도, 경찰이나 검찰 혹은 뒷세계 출신도 아니고 누가 봐도 샐러리맨에 가까운 남자인 걸요. 주로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지인의 지인들이나 찾아오는 작고 별 유명세 없는 탐정에게, 갑자기 불쑥 나타나 "제 친구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떡하죠?" 같은 엄청난 소리를 가져오는 의뢰인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대신 대체로 뭔가 수상쩍긴 한데 사건까지는 아닐 것 같은, 그런데 내 힘으로는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누가 좀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경우가 많아요.
여기 분명한 조짐이 있다
경찰은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나설 수 있지요. 하지만 탐정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주변에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한데' 하는 의혹만 가져도 제 3자의 일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의 권한이나 범위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요. 그렇다보니 탐정의 눈으로 의뢰를 쫓아가다보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조짐을 몇 번이나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언제든 극단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하는 기분 나쁜 냄새. 저는 스기무라가 그런 냄새를 자꾸 맡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사건에 대한 언론의 뒷북식 기사를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일이 벌어진 후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합니까? 하지만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아주 가까운 인물들도 '설마'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4편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장편이 아니라 중단편 연작입니다. 「절대영도」, 「화촉」, 그리고 표제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총 3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네요. 공통점을 찾자면 홍보 띠지에 씌인 것처럼 조금 곤란한 상황에 빠진 여자들이 나온다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사위에 의해 딸과의 모든 연락이 차단된 어머니, 결혼식 당일에 현장에서 파혼을 맞은 신부, 끊임없이 주변에 클레임을 걸고 문제를 일으키는 요주의 모녀. 하지만 모든 사건의 뒤에 여성을 경멸하는 최악의 남자들이 버티고 서 있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여자를 남자의 아래로 보는, 여자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여자에게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사회 전체가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절대영도」 가 대표적입니다. 딸을 감금(?)하고 딸과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있는 사위를 뒤쫓다보니 사위가 대학부터 쭉 몸담고 있는 하키 운동부가 나옵니다. 조사해보니 꽤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자 선배가 나오고, 그 선배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추종자들과 어영부영 끌려간 후배들이 나오고, 뒷풀이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여자친구나 부인은 호스티스처럼 웃으면서 술을 따라야만 하는 가부장적 여혐 문화가 나오죠. 다른 여자를 끌어오라고 후배들의 여자친구를 압박한 흔적도 여실합니다. 연락도 잘 닿지 않는 외지의 별장에 거짓으로 여자 하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운동 좀 했다 하는 남자들- 세상 어떤 여자가 여기에 기꺼이 초대받아 가고 싶어하겠어요? 너무나, 너무나 위험한 냄새가 나잖아요.
웃기지 마. 여자 주제에 건방져. 그런 태도가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 p.143
강압과 진상에 가까운 지분거림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후배의 여자친구의 친구에게 이런 문자를 날리는 남자. 여자 주제에, 후배 주제에 하면서 거들먹거리며 비열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남자.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경찰이나 언론에 제보할 수 없어요.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설령 저 남자가 스토킹을 했다고 해도,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은 정말! 너무! 말도 안 되게! 약해서 아마 벌금형도 받지 않고 집행유예나 기소유예 정도로 끝날 게 뻔합니다. 그 후에는? 저 남자에게 보복성 범죄를 당할까 벌벌 떨면서 살아야겠죠. 바로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이건 처벌할 가치가 없는 가벼운 일이라고 딱지를 붙인 행동들 사이에서 파국은 싹틉니다.
뻔히 보이는 어떤 조짐.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내면의 경고등.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외부에 공론화시키고 호소하기에는 미약한 상황 증거. 여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말이 눈앞까지 다가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그 폭탄을 개인적인 선에서 피할 수 있을 뿐입니다. 파국이 우리를 잡아먹기 전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 그게 개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게 정말 최선이어야 할까?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바로 이런 사회파 미스터리의 역할이겠죠.
우리는 비극을 어디에서 막을 수 있을까
「절대영도」 는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폭탄을 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아버린 사람과 그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악을 피하지 못했던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몇날 몇일을 언론에서 떠들어댈 만큼 큰 일이었기에, 작품 내에서의 여파도 상당합니다. 그렇게 짙은 어둠 속에 있던 사건으로 시작해서인지 두번째 사건 「화촉」은 갑자기 너무 작은 의뢰로 넘어가서 당혹스러운 감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살인과 강간, 폭행과 학대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없는 대신 오히려 스기무라 탐정이 더 직접적으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약간의 호의를 베품으로써 너무나 뻔히 보이는 불행한 결혼을 두 개나 막은 셈이니까요.
스기무라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지만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쓰이는' 오지랖을 부린 최고봉이 아마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일 겁니다. 거절하라고 분명히 경고를 받았고 본인도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딸인 모모코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제멋대로인 엄마한테 끌려와 기가 죽어 있으니 그게 신경이 쓰여 차마 거절하지 못한 의뢰죠.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억지였기 때문에 깔끔하게 딱 조사를 끝내서 더 이상 우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목적이었고, 당초 예정대로 조용히 해결될 뻔 하였으나 늘 그렇듯(...) 일이 커지고 말았던 케이스입니다. 그래도 스기무라처럼 감이 좋은 외부인이 끼어든 덕에 더 망가질 뻔한 레일을 달리지 못하게 멈춰둘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스기무라는 자기 보고서가 일을 불러왔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죄책감을 가지고 괴로워하지만, 경찰이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꽤나 적극적으로 개입해 최악을 막아준 모양새입니다. 다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외부에서 개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죠. 그 '한계'라는 게 한국이나 일본 사회처럼 가족 문제에 배타적인 문화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느껴지고요. 여기서 스기무라가 하고 있는 고민을 독자 역시 똑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정말 예외적인 특수한 상황일까? 이런 사람들이 언론에서 쏟아내는 범죄 기사 뒷면에 훨씬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을까? 혼자서 참고, 참고, 참고, 참던 사람들이 부러지기 전에 막아줄 수는 없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테시나 고로 경위가 스기무라에게 던진 한 마디는 독자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격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도 정신 바짝 차리고 힘내요, 탐정님 - p.462
세상에는 슬프고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가득하니, 그 고통을 어떻게든 덜어내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더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앞을 볼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부디, 정신을 바짝 차리시길. 그리고 우리 함께 이 아수라장에서 천천히 빠져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