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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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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스포 없이 후기를 써보려고 했지만, 대놓고 반전이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후기를 읽다보면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눈치챌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아무리 '범인이 XX다!'라고 하지 않으면 뭐하겠습니까? 후기를 읽다가 한순간이라도 '엇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런 식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반의 반으로 줄어들게 될 게 뻔한데요ㅠ 아무것도 모르고 소설을 읽고 놀라고 싶으신 분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본 신본격파 미스터리 대표작
일본 미스터리 추리 소설에는 몇 가지 계열이 존재합니다. 문학파, 사회파, 본격파, 하드보일드, 일상 미스터리, 코지 미스터리 등 워낙에 미스터리 장르가 발달한 나라이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세부 장르 역시 골고루 발달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요리코를 위해>를 쓴 노리즈키 린타로의 경우 본격파를 이은 신본격파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입니다. 신본격파 미스터리란 고전 소설에서 자주 쓰이던 사건-탐정-트릭-진상을 중요시하는 미스터리 장르에요. 사건이 있고, 범인이 있고, 그 범인은 교묘하고 놀라운 트릭을 사용했으며, 탐정 격인 인물이 그 트릭을 간파하고 진상을 파헤치는 게 기본 구조죠. 어릴 적에 자주 보시던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구성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요리코를 위해>는 1장에서부터 아예 범인인 아버지의 수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살해당하자 아버지는 분노하고, 경찰이 해주지 못한 복수를 자기 손으로 해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떻게 딸의 살해범을 논리적으로 추론했고 어떻게 확인했으며 어떻게 살해했는지 매우 상세하게 묘사해요. 모든 것이 다 착착 맞아 떨어지고, 딸의 복수를 끝마친 아버지는 살인자가 된 자신을 벌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집에 드나들던 간병인이 자살시도를 일찍 발견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거예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1) 사건과 관련된 주요 정보를 숨기고 있었으며 헛발질만 했던 경찰 2) 추문을 피하기 위해 경찰에 압력을 넣은 학교 3) 학교와 유기적으로 엮여 있어서 혹시나 타격을 입을까 전전긍긍하는 정치권 같은 외부 권력들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노리즈키 린타로에게 의뢰가 오게 됩니다. 진상을 밝혀달라고 고용된 게 아니에요.
덕분에 무지몽매한 대중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을 언론에서 본 것만으로도 즉시 이렇게 믿게 되지. 아아, 이 사건에는 뭔가 괴상망측하고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저 명탐정이 굳이 나설 이유가 없잖아, 하고. 물론 그런 믿음 따윈 아무 근거 없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p.98)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캔들 무마용으로 윗분들이 급하게 고른 병졸이 우리의 탐정이었다 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리즈키 린타로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윗분들의 입맛에 맞는 일만 하지는 않지만요.
일종의 서술 트릭입니다. 후기에 이 단어를 쓸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요. 서술 트릭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때론 모든 진상이 손쉽게 드러나니까요. 하지만 책 뒷표지와 짧은 소개글에서부터가 이미 스포의 시작이기 때문에.. 서술 트릭은 서막에 불과하거든요. 작품 내내 '아버지의 수기는 뭔가 믿을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싶더라고요.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차단된 클로즈드 서클에서 제일 처음에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 뭐 그런 법칙처럼 모두가 다 아는 거잖아요ㅋㅋㅋ 아마 수기에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한 독자들도 계속해서 탐정이 뭔가 걸린다, 이상하다고 하는 순간 '도대체 아버지는 수기에서 뭘 감추고 있을까?' 하고 되돌아보게 될 겁니다.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한정적인 편이라 읽다보면 범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도 보이고요. 하지만 도대체 어떤 트릭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게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이죠! 놀랍고 참신한 속임수를 두고 범인과 탐정&독자가 한 판 두뇌싸움을 벌이는 거요~ 사건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고 해도, 도대체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탐정이 밝혀내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니까요ㅎㅎ
한 사람을 위한 마음
1989년을 배경으로 한 십수년 전의 작품인 만큼 지금 보면 상당히 위화감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같으면 바로 뱃 속의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DNA 검사로 바로 알아내겠죠. 특히 미성년자 여성이 임신을 한 채 살해당했다면 범인이 아이 아버지일 가능성이 몹시 높으니까 가족이 원하지 않아도 검사가 필수적으로 진행될 겁니다. 하지만 일본의 80년대 후반, 일본이 한국보다 10여년 앞선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 후반쯤 되겠죠? 이때는 임신을 했다는 걸 아는 게 고작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 아버지를 추려내는 방식 자체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거든요. 논리적인 추론으로 후보를 하나하나 좁혀나가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이라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잖아요. 프로파일 비스무리 하긴 한데 정확도가 좀 떨어져요; 물론 그 덕에 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거지만요. 요즘 같았으면 어림도 없어요~ 시작 전에 다 들통나요~
약간 뒤틀린 관계가 메인이 되는데 이게 좀.. 일본스러운 감성이다 싶기도 합니다. 아니, 한국에 이런 병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한국과는 꽤 다른 양상이에요. 가족관계나 종교, 불륜이나 정치권 같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기저에 깔린 정서가 한국과 많이 달라요. 제가 특히 신기하게 보는 건 '여고생'에 대한 감각입니다. 실제로 여고시절을 지나왔던, 그리고 지금도 주변에서 여고생을 보곤 하는 사람으로서 일본 창작물의 여고생은 실존하는 특정 계층이라기보다 '클로즈드 서클'처럼 창작물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 인간들이라는 느낌이에요. 환상이 지나쳐서 숭배와 혐오를 동시에 하는 느낌인데, 이 위화감은 제가 한국+여성 독자라서 느끼는 거일지도 모르겠어요.
트릭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프로 작가로 데뷔하기 전 대학교 미스터리 서클 아마추어 시절에 습작한 작품에서 구상한 아이디어라는데, 정말 대단해요! 본격 미스터리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작가가 똑똑한 만큼만 범인이 똑똑하잖아요. 게다가 물론 범인과 트릭이 중요하고 그걸 위한 미스터리지만, 그 외에도 인물들의 뒤틀린 관계가 강하게 인상에 남습니다. 보통 본격 미스터리는 오로지 논리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라는 느낌이 있어서 뒷맛이 깔끔한 편인데 이 작품은.. 진상이 좀 참혹해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씁쓸해요. 결국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에서 시작된 불행이 가족 모두를 덮쳐 일가족 모두를 망쳐버렸다 싶거든요.
<요리코를 위해>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에는 요리코를 잃고 복수를 향해 폭주하는 아버지의 심경처럼 들리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심경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남겨진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요리코만 신경쓸 수가 없는 거죠. 오로지 린타로만이 딱 요리코만을, 피해자만을, 그 여자아이만을 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탐정이나 경찰에게 필요한 소양입니다. 변명도 하소연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이미 목소리를 잃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목소리를 내는 일이요.'산 사람은 살아야지' 같은 멘트는 죽은 사람에게 너무 부당하잖아요. 요리코는 누군가는 자기를 대변해서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을 거예요.
워낙에 유명한 작품인 만큼 이미 읽으실 분들은 다들 읽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미스터리를 사랑한다 하시는 분 중에 아직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무더운 여름밤 이 책과 함께하시면 어떨까요? 덮고나면 조금은 서늘해질 지도 몰라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