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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는 사설이 굉장히 긴 소설입니다. 이야기가 빨리 전개되지 않고 한 장면 한 장면의 호흡이 굉장히 긴 편이에요. 동명의 뮤지컬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야기의 제일 초반에 그윈플렌을 납치해 얼굴을 완전히 변형시킨 악당 조직이 배를 타고 가다가 침몰하면서 신께 기도드리는 장면이 짧게 지나가거든요? 길어봤자 5분이 안될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빅토르 위고는 이 범죄조직의 역사와 문화부터 시작해서, 현재 왜 이들이 배를 타고 떠나가야 하는 상황인지, 왜 죽기 전에 갑자기 회개하기로 마음먹고 자기들의 죄악을 적은 종이를 병에 넣어 바다에 던지기로 결심했는지를 몇 십장에 걸쳐서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읽다보면 '그래서 언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같은 생각이 들어요. 워낙에 필력이 좋은 작가라 술술 읽히긴 하지만요ㅋㅋㅋ
시대적 배경과 문화 묘사에 심혈을 기울인 소설이라, 주인공이 상당히 나중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워낙 앞서 설명을 잘 해놔서 이 꼬마아이가 느끼는 담담함이 엄청 잘 와닿아요. 이 아이가 아마 7~8살쯤 됐을 텐데, 세상 모든 일에 무지하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 나이쯤 되면 그 나이의 지혜가 쌓이니까요. 그런데 이 아이는 납치를 당해서 강제로 얼굴이 변형되면서 기억에도 영향이 있었던 말이죠. 그래서 갑자기 세상에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갑자기 한겨울 고립무원에 남겨졌는데,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공포나 절망 같은 걸 느끼지를 못해요. 그냥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게 보이면서, 독자로서 이 아이에게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웃는 남자>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그윈플렌이 데아를 발견하고 구해내는 장면입니다. 거의 누더기 같은 옷 하나 걸친 채로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서 몇 십 킬로를 걸어온 꼬마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눈 속에서 얼어죽은 시체에 안긴 아기를 거의 발굴하다시피 꺼냅니다. 사실 그윈플렌에게는 그 아기를 구해낼 의무도, 여력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아기를 안아든 순간, 이 꼬마는 자기가 입던 옷을 벗어서 아이에게 입히고는 자기는 거의 벌거숭이가 된 채로 길을 떠나요. 아기를 안고 걸어야 하니 제대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체력도 훨씬 더 빨리 떨어지고요.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아니고, 도덕이나 법률을 교육받아서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윈플렌의 태도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아기의 엄마를 소환하며 쓴 표현도 좋아요.
아기의 엄마는, 눈 위에 등을 대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어린 여자 아이를 감싸려고 옷을 벗었을 때, 무한의 저 깊은 곳에 있던 그녀는 아마 소년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디어 자체는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에 대입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누구나 청소년기에 한번쯤 품어봤을 상상이잖아요. 아니, 내가 알고보니 사회 최상층의 정통 후계자? 뭐 이런 거요. 근데 여기에다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야무지게 넣어놔서 감탄했어요. 소위 말하는 사이다 감성이 하나도 없거든요. 역시 거장은 다르구나 싶었어요. 단순히 이제부터 나는 잘 먹고 잘 산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날들이여 안녕~ 이렇게 되지 않아요. 갑자기 뚝 떨어진 다른 세계의 인물을 어떻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해먹을까 사방팔방 노리는 수많은 인물들의 욕망과,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는 와중에 얼떨떨하고 기분 좋으면서도 '그래도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말을 하라는 뜻 아닐까'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변을 토하기도 하는 선의와 허영심과 순수함이 뒤섞인 마음과, 그 와중에도 철저하게 추방당하며 고통받는 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한데 뒤섞여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재밌게 읽었고, 멋진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결말을 사랑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끝맺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영혼의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왜 꼭 굳이 이렇게까지 비극이었어야 하는 거죠? 다 읽고나면 그전까지도 마음 한 켠에서 정을 붙이고 있던 우르수스를 생각하며 광광 울게 됩니다. 우르수스.. 아이고 이 아저씨 어떡합니까.. 약간의 희망 비스무리한 찌꺼기라도 남겨주시지, 작가님도 참 너무하셨네 싶어져요ㅠ
그래도 그 결말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잉글랜드의 온갖 제도와 사회문화적인 측면이 너무 흥미로워서, 정말 재밌게 읽긴 했습니다! 혹시 뮤지컬을 보시고 책에 도전해보시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전 추천이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