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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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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스 마플>의 실사판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법의생태학자, 퍼트리샤 월트셔! 그녀는 꽃가루에 능통한 식물학자로 이름을 떨치다가, 어느 날 경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법의생태학의 세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녀가 지적했듯이 아직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물론 한국도 포함입니다) 그게 뭔지 제대로 모르지만요. 지문이나 DNA 같은 '범인도 주의하면 남기지 않을 수 있는' 흔적과 달리, 범인이나 피해자의 옷이나 차, 피부나 머리카락에 남은 생태학적 흔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 때문에 더욱 확고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했지만요.
읽는 내내 정말 놀랍고 부러웠습니다. 이런 직업이, 이런 작업이 한국에서도 하루빨리 현장에 도입됐으면 좋겠어요! 범인이 자신이 묻힌 줄도 모르고,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증거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억울함이 사라지겠어요? 퍼트리샤의 책에 따르면, 특히 실종사건이나 강간사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더라구요. 강간의 경우 범인이 "우리가 성관계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합의하에 한 일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피해자의 몸에서 DNA가 검출된다 해도 별로 도움이 안 되잖아요. 성관계 자체는 인정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후의 진술이 엇갈릴 경우, 양 쪽의 몸에 묻은 생태학적 증거들을 채취해 대조해보면 누구의 진술이 맞는지 판가름이 나서 사건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범인은 감옥으로, 무고한 사람은 사회로, 피해자는 가족의 품으로!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혹은 잘못 기억할 수도 있죠. 관계자가 2명 이상일 때, 모두의 말이 맞는 경우는 오히려 굉장히 드물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의 진술에서 어떤 부분이 정확한 사실이고 어떤 부분은 오류인지 잡아내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잘못 기억하지도 않죠. 내가 장미덩쿨 근처에 있었다면 내 몸에 묻은 생태학적 증거는 장미덩쿨을 가리킬 겁니다. 반대로 내가 놀이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분수대 옆에 있었다고 우겨봤자, 내 몸의 증거들은 다른 말을 할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아니죠. 우리는 더 확실한 증거, 더 정확한 증거를 찾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영국 내에서도, 심지어 퍼트리샤가 이렇게 유명해진 지금까지도, 현장에서 생태학적 증거를 오염시키는 일은 상당히 흔한 것 같더라구요. 현장 경찰이나 부검의, 심지어는 다른 법의학자들까지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이걸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의아해하고 비웃는 경우도 많았대요. 물론 퍼트리샤는 신경 쓰지 않고 '피고 측 변호인이 똑똑하다면 무슨 질문을 할까?' 한 발 먼저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오염을 막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고, 장소나 사람을 특정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 노력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한 장르의 선구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외부로부터 거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해낼 수 있나 정말 놀라울 뿐이에요!
게다가 생태학의 세계는 아직 무궁무진합니다. 제가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아주 어렴풋이 의심하긴 했지만) 사망 추정시간을 예상하는 데 너무나 변수가 많아서 아직까지 우리 과학으로는 유의미하게 특정을 짓기가 어렵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윌리엄 배스는 경찰로부터 사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밝혀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정작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는지 느끼고 '시체 농장'을 세웁니다. 과학자니까 데이터가 필요했던 거죠. 자연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환경과 변수 하에서 시체를 실제로 관찰하고 정말로 시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기록하는 겁니다. 이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실제 현실에서 발견되는 많은 시체들이 언제 죽었는지 더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고 있기도 하고, 유색인종과 여성의 비율이 턱없이 낮아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문제점도 있어요. 저만 해도 선뜻 제 시체를 기부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죽은 후에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선뜻 내키지는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데이터들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현실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더 널리 알려져서 저항감이 좀 들어들면 좋겠어요.
중간에 몇 부분 문장이 어색한 게 있어요. 예를 들면 166페이지. "자생종 야생동물들도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이런 곳들을 나는 항상 이런 장소를 암울함과 파멸이 짙게 드리운 곳이라고 여겼다." 이런 곳들을/이런 장소를 하면서 같은 워딩이 두번이나 들어갑니다. 뒤에 하나는 빠져야 맞는 문장이겠죠? 193페이지는 약간 헷갈립니다. "당신의 심장은 뛰지 않고 폐는 숨을 쉬지 못하며 몸 전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를 퍼뜨린다." 여기서 몸 전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를 퍼뜨리는 주체가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아요. 아마 짐작하기로는 혈관이나 뇌가 들어가야 맞지 않은가 싶은데, 아니면 앞부분과 연결되어 폐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쉼표가 하나 들어가든지 아니면 주어가 하나 더 들어가든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건 사소한 부분이지만요.
정말 모든 챕터 하나하나가 다 흥미로워요. 심지어 수사와는 관계없는 본인의 어릴 적 얘기조차도 그렇다니까요! 세계 제 2차 대전에 태어나 온몸에 화상을 입어 병치레로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던 소녀시절을 거쳐 지금 영국 최고의 법의생태학자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분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더라구요ㅋㅋㅋ 왕년에(?) CSI나 범죄수사 드라마를 즐겨보셨던 분들이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살인과 강간, 범죄와 수사, 증거와 재판, 죽음과 인간.. 이런 요소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즐거운 독서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