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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189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브램 스토커 지음, 원은주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10월
평점 :
이름만 딱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캐릭터를 창조해낸다는 것, 모든 작가들의 꿈 아닐까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그 엄청난 영향력으로 이젠 드라큘라라는 단어 자체가 흡혈귀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지요~ 실제하는 역사와 전설, 인물을 엮어서 하나의 소설로 탄생시켰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 같아요. 지금 보니 <드라큘라> 자체에는 현재 우리가 아는 흡혈귀 설정과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창작에 창작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우리가 아는 흡혈귀가 된 것 같아요.
고딕 소설 vs 대극장 뮤지컬
얼마 전에 뮤지컬 <드라큘라>가 성황리에 마쳤는데, 뮤지컬과 소설을 비교해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다른 점이 많거든요. 대극장 뮤지컬과 고딕 소설이 가지는 장르적인 차이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소설 속 드라큘라는 절대, 절대, 절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완전한 악역입니다. 최종빌런 그 자체거든요. 여주인공과 아련하고 사연 많은 과거가 있지도 않고, 심지어 미나는 (살아남긴 하지만)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중반까지 비중이 엄청나게 낮아요. 중반까지는 오히려 루시가 더 주인공 같다니까요. 뮤지컬에서는 그저 '주인공의 친구' 정도로, 세 남자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드라큘라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그 루시가요! 소설에서는 거의 미나만큼이나 추앙받지만 안타깝게도 구해지지 못하는 여성이에요. 미나와 같은 상황 다른 결말을 맞는 운명이랄까요.
드라큘라가 대놓고 악역인 만큼 외모도 굉장히 추하게? 인상적이게? 나옵니다. 보통 악=추한 외모로 등치시켜서 나타내곤 하니까요. 매부리코에 창백한 얼굴, 악마처럼 붉게 빛나는 두 눈은 드라큘라 백작의 트레이드 마크에요. 다양한 등장인물의 일기나 수필, 메모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드라큘라 백작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붉은 눈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처음부터 인외라는 힌트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예를 들어 조나단이 면도를 하다가 실수로 얼굴을 베는 장면 같은 경우, 뮤지컬에서는 그저 실수일 뿐이지만 소설에서는 드라큘라 백작이 거울에 비치지 않은 걸 보고 너무 놀라서 손이 헛나간 거예요. 조나단은 드라큘라 성에서부터 이 존재가 사악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성에 갇혀버린 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악을 대비하며 일기를 씁니다. 뮤지컬과 달리 미나는 드라큘라 성에 방문하지 않고요.
뮤지컬과 비교해서 보면 정말 신기한 게, 어떻게 이런 원작에서 그런 로맨스를 뽑아냈지? 싶어요. 렌필드만 해도 드라큘라랑 전혀 상관이 없고 그냥 혼자만의 믿음으로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면 영생을 할 수 있다! 하고 믿는 정신병자일 뿐이거든요. 나중에야 병원에 드라큘라를 안으로 초대함으로써 드라큘라랑 엮이게 되는데, 그 전까지는 그냥 수어드 박사의 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런 인물을 조나단의 선임자로서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방문한 뒤에 정신병원에 갇힌 인물로 살짝 틀어서 훨씬 더 개연성 있게 만들다니, 역시 2차 창작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1897년의 과학, 2020년의 과학
흡혈귀 전설을 다루고 있어서인지, 작가 본인도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듯한 묘사가 눈에 띕니다. 수혈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은 현대에서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어요. 예를 들어 용감한 남자의 피를 받았으니 저 여자는 이제 생명력을 가지게 됐어! 하는 식의 묘사가 꽤 나오는데, 남자의 피든 여자의 피든 상관없이 피는 그냥 피일 뿐이잖아요. 당시로서는 남자의 피가 여자의 피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요. 피를 한 번 수혈해주고 나면 몇날 몇일을 꼬박 수척하게 지낸다는 묘사도 그래요. 저도 헌혈 많이 해봤지만 하루 정도 물 많이 먹고 푹 쉬면 괜찮아지잖아요? 체력에 무리가 갈 정도로 엄청난 양을 뽑아냈다면 좀 힘들긴 하겠지만요.
제일 뜨악했던 건 혈액형 검사를 하지 않고 그냥 일단 남자의 피니까 당연히 OK, 하는 식으로 막무가내 헌혈을 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마 작품을 쓸 때는 아직 혈액형이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던 시기인가봐요. 루시의 혈액형이 뭔지 모르는 상태로, 아서-수어드-모리스-반 헬싱의 혈액형이 뭔지 모르는 상태로 그냥 수혈을 진행합니다. 혈액형이 맞지 않아서 충돌 일으켰으면 드라큘라가 아니라 수혈 때문에 루시가 죽었을 텐데, 다행히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걸로 봐서 남자들이 전부 O형이었나봐요;; 현대의 과학 지식을 가지고 과거의 작품 속 흠결을 놀리는 건 좀 공평하지 못하긴 하지만, 읽을 때 물음표가 뜨는 건 사실이니까요ㅋㅋㅋ
굉장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도드라집니다. 미나가 똑똑해서 그에 대한 칭찬을 하고 싶으면 그냥 똑똑한 여성이다 하고 1절만 하면 되는데 남성의 뇌를 가졌다는 둥, 훌륭한 여자는 자신의 삶을 전부 말한다는 둥 2절, 3절, 4절.. 끝도 없이 해요. 공포 장르가 대개 그렇듯이, 결국 살아남는 건 가부장제에 순응하고 철저하게 편입된 여성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미나 역시 일에 엮인 당사자인데 살살 추켜세우는 척 모든 사건에서 쏙 빼버리는 걸 보면 현대 여성 독자로서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결국 미나를 지키지도 못하고 미나한테 도움받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죠;;
그리고 마담 미나,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될 때까지는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이 일에서 바지세요. 마담은 우리에게 너무 ㅁ소중한 분이라 그런 위험을 감당하게 둘 수 없어요. 오늘 밤 회의가 끝나면, 마담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마세요. 때가 오면 마담께 다 말씀드릴 겁니다. 우리는 남자들이고 견딜 수가 있죠. 하지만 마담은 우리의 별이자 우리의 희망이니, 마담께서 위험하지 않아야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겁니다 - p.477
게다가 드라큘라가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으면서 "너희가 사랑하는 너희 여자들은 이미 내 것이다" 하고 협박하는 장면은 여자를 소유물로 보는 시각이 대놓고 보여서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남자가 보통 '(적들이) 우리 여자를 강간할거야' 하는 공포를 가지곤 하잖아요. 공포를 얘기할 거면 자기가 강간당할 공포를 상정하든지;; 이게 뭐람;; 어쨌든 백 년도 더 넘은 옛날 빅토리아 시대 작품이라는 건 감안해야겠죠.
저는 흡혈귀가 굉장히 카톨릭적인 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모든 나라 모든 문화권에 흡혈귀가 나온다는 것은 그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는 식의 논리를 펼쳐서 좀 신기했습니다. 중국에도 흡혈귀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흡혈귀가 카톨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도대체 왜 십자가나 성체에 그렇게까지 반응을 하겠어요? 중국 부적 쓴다고 드라큘라가 물러가지도 않을 텐데 말이죠. 결국 '카톨릭'과 '과학'으로 대변되는 1897년의 신봉 가치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괴물을 물리친다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종교적이에요.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조금은 엿보이고요.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는 일단 표지가 예뻐서 좋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관객 입장에서 뮤지컬 원작 소설을 꾸준히 내줘서 정말 좋아요♡ 원전과, 그에 파생되어 나온 다른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정말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비교해가면서 읽는 재미가 늘었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많은 작품 내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