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매니페스토 - 행복과 성과를 끌어당기는 뉴노멀 경영 전략
헨리 스튜어트 지음, 강영철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되라! 거나 회사생활 이렇게 해라! 하는 식의 책을 꽤 읽었던 것 같아요. 저는 창업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용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지점이 더 우선 관심사였거든요. 하지만 막상 경영자 입장에서 이런 회사 만들어서 나는 성공했다! 하는 경험담을 듣고 있자니, 이게 정말 모두 다 진짜라면 정말 한번쯤 일해보고 싶습니다. 꿈의 회사 같아요. 이런 곳이 2020년 판데믹 이후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니, 정말 놀라워요!


 이 책을 쓴 경영자가 찾아낸 최고의 성과를 내는 비밀은 이렇습니다. 직원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어라! 누구나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 하지만 정작 실천하는 경우는 드문데, 헨리 스튜어트는 Happy 라는 사업체를 진행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정말로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학위도 경력도 없는 직원에게 재무를 맡긴다든지,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든지,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할 때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다음 직장을 찾아준다든지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직원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시도했더라고요. 단순히 '그게 도덕적으로 옳으니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직원이 행복한 기업 문화를 만들면 성과가 나옵니다 믿어보세요' 하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어요.


 정말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직원을 두고 사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다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두리뭉실하게만 말하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줘서 '아 이런 식으로!' 하면서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 돌리기 좋더라고요. 예를 들어 큰 실수를 해도 비난하지 말고, 행위자가 아니라 해결 방법을 찾아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굉장히 원론적이잖아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생활에서 적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주니까 확 와닿아서 좋았습니다.


 헌츠맨 사무실 벽에는 눈에 아주 잘 띄는 커다란 빨간 버튼이 부탁돼 있다. 이 버튼을 누르면 공장 내 모든 화학물질이 지역 하천으로 자동배출된다. 짐작할 수 있듯이 비상상황에만 눌러야 한다. 

 어느 날 공사용 철근 비계를 회사로 들여오게 됐다. 공사인부 한 명이 비계를 어걔에 메고 빨간 버튼이 있는 사무실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쯤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인부가 자기도 모르게 비계로 빨간 버튼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 즉시 회사의 화학물질이 하천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비계 공사를 맡은 시공사는 즉각 인부를 해고했다. 그러나 정작 큰 손실을 본 헌츠맨의 대응방식은 달랐다. 헌츠맨은 시공사에게 그 인부를 복직시키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헌츠맨 공사장에서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 p.248


  이 사례가 특히 좋았던 건, 책 속에서 묘사된 앞뒤정황을 보고 '아니 근데 이건 회사 책임도 있는 거 아니야?'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는데, 당사자인 회사 역시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저렇게 중요한 버튼을 누구든 드나들다가 실수로 누를 수 있는 곳에 떡하니 만들어놓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다뇨? 해당 인부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사고가 났을 게 뻔하잖아요! 다행히 저 공사인부는 자기 잘못을 은폐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매우 중요한 자질이지만 누가 그랬는지 가려내 책임을 묻기 바쁜 문화에서는 양심적인 사람도 즉각 반응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빨간 버튼이 눌리자마자 즉시 회사에 알린 덕분에 늦지 않게 수습할 수도 있었고, 대책도 마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마 화학회사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봤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더 큰 손해를 막은 셈이기도 해요.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고 해당 인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회사가 거의 없다는 거죠. 누가 그랬냐? 이 책임론 떄문에 골치 썩어보지 않은 직장인이 과연 있을까요?ㅋㅋㅋ



 아무리 급여를 공평하게 지급한다 해도 급여 정보를 비밀로 하면 사람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게임을 하는지 일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매일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매니저의 술친구가 되거나, 상사의 편애를 받으면 자기보다 높은 급여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직원이 이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는 순간 사기는 떨어진다. 불행하게도 급여를 공개하지 않으면 이러한 상상이 종종 현실로 나타난다. - p.181


 "연봉을 공개하라"는 이 부분도, 정말 공감! 완전 공감! 제가 정말 싫어하는 구인 공지 문구가 있는데 바로 [급여는 회사 내규에 따름] 같은 문구를 적어놓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적어놓을 거면 급여에 관한 회사 내규도 같이 올려줘야죠. 도대체 얼마를 주는지, 그게 적당한 급여인지 아닌지, 그 일을 할 경우 생활을 꾸릴 수 있을지 없을지, 당연히 알 수 있어야 지원하든 말든 할 거 아녜요. 급여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요. 특히 한국에서는 최저 시급도 안 되거나 교묘하게 주휴수당을 월급에 은근슬쩍 넣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적어도 얼마부터 얼마쯤 되겠다 대충이라도 가늠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회사가 차고 넘쳐요. 연봉을 까지 못한다는 건 뭔가 구린 게 있는 거예요. 너를 착취할 건데 그 사실을 넌 몰랐으면 좋겠어~ 하는 선언 같은 느낌이라고요. 회사에서 전 직원 연봉 공개에 난색을 표하는 이유도 당연히 반발할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왜 다른 직원 연봉을 보고 반발하는지, 그 불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도 안 하고! 이런 게으른 놈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람을 쓰란 말이야! (갑분)


 보는 내내 이렇게 다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직원과 함께 성장하는 회사라면, 나를 부품이 아니라 파트너로 대해주는 회사라면, 꼭 한 번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급여'와 '안전'과 '안정'만 보장된다면, 직원들이 열심히 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데 동감합니다. 다들 아무리 돈 있는 백수가 되고 싶다고 떠들어도, 사람은 결국 인정욕구를 가진 이상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능력을 더 끌어올리고 싶고, 최대한 발휘하고 싶기 마련이니까요. 직원이 행복한 회사.. 한국에도 이런 문화가 뿌리내리면 좋겠네요. 제발.. 플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죄 심리의 재구성 - 연쇄살인사건 프로파일러가 들려주는
고준채 지음 / 다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직 프로파일러가 썼음에도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범죄' 그 자체보다는 그걸 '예방'하고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 내용이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서도 관계자의 이름이나 사건을 그대로 싣지 않고, 사건 개요만 간단하게 짚으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했더라고요. 개인정보 침해나 2차 가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건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터뷰나 저서도 많은데 (특히 법조계,경찰계,의료계 쪽에서 이런 케이스를 많이 봤어요) 그에 비해 사건 피해자 혹은 관계자를 꼼꼼히 신경쓴 모양새여서 마음에 들어요.


 전체적으로 '이렇게 우리나라에 이렇게 잔인무도한 사건이 있었지! 이런 범죄자들!' 하고 사건을 늘어놓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러이러한 이론이 있는데 역사는 이렇고, 현재 현장에서 활용되는 모양새는 이렇고, 관련 직종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이러이러한 자격증을 딴 후에 이러이러한 시험을 치면 됩니다~ 하고 알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저도 쉽고 재밌게 읽었지만 앞으로 경찰 쪽에서 프로파일러로 일하고 싶은, 아직 진로가 열려있는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이 읽으면 엄청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우리나라 경찰에서 과학수사요원이 되려면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 번째는 기존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부 선발과 전공 학위 및 자격으로 선발하는 경력 채용이다. 과거에는 형사 경첨이 있는 경찰관 중에서 뽑는 내부 선발 위주였으나, 범죄 수법이 발전하고 연쇄살인, 묻지마 범행 등이 늘어나면서 과학수사에 대한 전문성의 필요성이 커져 2013년 처음으로 일반 과학수사요원을 특채하기 시작해 매년 20여 명의 과학수사요원을 경력 채용하고 있다. 과학수사요원 경력 채용 제도는 법과학, 과학수사 관련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일반과학수사, 화재안전, 생체증거, 영상·광원 등 분야별로 시행되고 있다. - p.104


 이런 식으로 챕터 끝마다 항상 관련된 분야와 직업은 무엇이고,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증이 필요하며, 사람은 몇 명 뽑고 현재는 어떤 식으로 경찰 내부에서 일하고 있다 하고 꼭 짚어줘서 막연하지 않고 굉장히 구체적인 조언이라는 느낌이에요.


 제가 제일 흥미로웠던 건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범죄자가 범죄 기회를 잡기 어려운 구조의 설계로,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예방한다는 것이죠. 최근 대두되고 있는 개념이라는데, 어릴 때 비슷한 사례를 보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CCTV가 없는 길목이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길목보다 당연히 범죄자 입장에서는 더 일을 저지르기 좋겠죠? 사람들의 목격이 쉽고, 도주가 어렵고, 사각이 없는.. 그런 건물을 설계한다면 그렇지 않은 건물보다 범죄발생율이 훨씬 낮아질 거라는 개념입니다. 범죄라는 게 한 번 일어나면 피해자나 그 주변의 회복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게 범죄를 잡아내 처벌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싶어요. 관련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네요!


 프로파일러의 눈으로 바라봄 한국의 잔혹 연쇄살인범들~ 한국 사회의 어두움~ 이런 걸 강조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 걸 기대하고 보시면 실망하실 거예요. 오히려 경찰이라는 조직 안에 형사와 프로파일러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으며, 그게 다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한 책입니다. 저는 만족, 매우 만족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물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야베 미유키처럼 작품이 끊이지 않는 작가를 좋아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게다가 미미여사는 연작시리즈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작가잖아요! 주인공에게 정이 담뿍 들어버려 '아 조금 더 만나고 싶은데' 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독자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인생의 굴곡을 거치며 사건을 맴도는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고 불리는 '에도 시대 배경'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와 청자가 1:1로 마주보고 괴담을 말하고 듣는, 조금은 별나고 이상한 자리로 유명한 미시마야 주머니 가게. <흑백>과 <안주>, <피리술사>와 <삼귀>에 이어 <눈물점>에서도 여전히 미시마야의 괴담 자리는 호황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놀랍게도 주인공이 바뀌었어요! 물론 그 전 시리즈에서부터 조금씩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함께 괴담을 들으면서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오치카가 없으니 조금은 쓸쓸하더라고요. 하지만 편집자 후기에서도 보이듯, 작가가 오치카에게도 사연에서 벗어나 행복을 거머쥘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니.. 오치카를 애정하는 팬으로서 기쁘게 보내줘야겠죠. 오치카 대신 청자로 앉게 된 이는 미시마야의 두번째 도련님 도미지로입니다. 집안을 이을 필요가 없어 유유자적하는 한량 둘째인데, 아무래도 괴담 자리에는 적당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집안 살림에서는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낙점된 것 같아요.


 총 4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확실히 에피소드의 성격이 좀 바뀌었어요. 만약 들어주는 상대방이 여자, 그것도 시집가지 않은 처녀였다면 상대가 차마 꺼내지 못했을 민망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자다운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나름 거칠게 살아온 남자가 여자에게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도 있고요. 오치카가 '여자였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었던 화자가 있었다면 반대로 도미지로가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한량이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화자도 있다는 거죠. 괴담이 더 풍성해진 것 같아 좋기는 한데, 반대로 앞으로는 오치카에게만 말할 수 있었던 화자들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아닐까 싶어서 쓸데없는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눈물점]이나 [시어머니의 무덤]은 조금 부조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뒷맛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쩄거나 듣고 버릴 수 있는 게 확실했거든요. [동행이인]은 상대적으로 무섭다기보다는 따뜻하고 다정한 괴담이었고요. 하지만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은 여러모로 뒷맛도 개운치 않고 일본 내에서 종교를 다루는 태도 역시 신경이 쓰여서 계속 기억에 남아요. 여운이라기보다는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맛이 있네요. 저도 특정 유일신 종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일본인들이 그게 기복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태도는 좀 우습지 않나 싶었거든요. 일본인들이야말로 사방팔방 모든 신에 기복을 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곳에 다 기도를 올리고 참배를 드리잖아요;; 그리고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의 화자는 시종일관 과거 회상 속에서 좀 밉살맞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저절로 한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ㅋㅋㅋ 뭐, 반성하고 새사람이 됐다니 이제 된 건가 싶기도 하지만요.


 온갖 요괴와 귀신과 신이 나타나는 나라여서 여기저기서 괴담을 짜깁기하는 게 더 쉬울 텐데, 모든 에피소드가 창작이라는 게 정말 놀라워요bb 다채롭고 부조리하면서도 또 나름대로 그 안에서는 논리와 체계를 가진 괴담이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역시 현상보다는 해석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괴담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까요. [동행이인]의 눈코입 없는 남자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정말 탁월한 해석자죠! 괴담에서 이만큼 현실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동안 미시마야 주머니 가게를 사랑하셨던 독자라면, 좀 더 색다른 느낌의 에피소드를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미시마야 시리즈를 모르신다면, 반대로 <눈물점>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거슬러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괴담을 사랑하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에도 여러 가지 하위장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드보일드'이다. 거칠고 비열하고 냉혹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외로운 한 마디 늑대처럼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거리를 걷는 주인공. 술과 담배와 여자와 권력의 유혹이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 경찰과 검찰, 깡패와 범죄자가 뒤섞여 선과 악이 분명히 않은 세계의 구도자. 레이먼드 챈들러는 바로 그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창조자이고, 탐정 필립 말로는 그 대표 격이다.


 <기나긴 이별>은 탐정 필립 말로가 우연찮게 만난 테리 레녹스라는 남자에게 우정과 호의를 느끼기 때문에 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필립 말로 시리즈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후속작이 있지만 챈들러가 완성시키기 전에 사망했다) 그 이전에 필립 말로 시리즈를 충실히 따라온 독자가 아무래도 좀 더 주인공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사랑하기가 쉽다. 만약 이 소설로 처음 필립 말로를 만났다? 그래도 물론 상관은 없다. 시리즈물이 으레 그렇듯,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를 위해서 작가는 묘사를 충분히 해주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과 별개로, 이 작품 내에서 필립 말로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조금 어렵기도 하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왜냐면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느끼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그냥 흔한 알콜중독자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데 왜 말로는 그렇게까지 테리 레녹스를 챙기는 걸까? 잘 모르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질 않나, 총을 들고 집 앞에 나타난 그를 해외로 도피시키는 데 도움을 주질 않나, 그를 위해 온갖 협박과 수모를 감당하질 않나. 그저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는 좀 과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겠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없는 장르. 물론 동성애는 아니다. 그건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정'으로 퉁쳐지는 그 무조건적인 호의와 헌신과 의리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여자 독자로서 하드보일드를 읽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팜므파탈 아니면 투명인간이거든. 007 시리즈를 생각하면 된다.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와 썸을 타고 그의 이성애적 매력을 빛내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잖아. 하드보일드 내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딱 그렇다. <기나긴 이별>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실비아 레녹스/린다 로링/에일린 웨이드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이성애적인 매력을 뿜어대면서 남자를 홀리는 존재들이다. 나쁜 짓을 했든 하지 않았든 똑같다. 진정으로 필립 말로의 세계에서 호의와 애정을 받기는 글렀달까. 이 비열한 세계에서 비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남자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드보일드가 매력적일 수 있는 건, 폭력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서 거기 기대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는 주인공이 뿜어내는 어떤 아우라 덕분이다. 뛰어난 사건 트릭도 물론 한 몫 하고! <기나긴 이별>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번갈아가면서 나오는데, 당연히 두 사건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걸 눈치챈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엮였으며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 외에도 소소한 수수께끼나 트릭이 꽤 있어서, 필립 말로가 속임수를 간파하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늙고 약해진 (물론 그 와중에도 타협은 하지 않는) 말로가 만약 계속 시리즈로 등장했다면 어떻게 변해갔을까 상상하는 건 덤! 아마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았을까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들의 범죄>는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트릭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도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가는 1988년이 배경이라, 최근에 출간되었는데도 옛날 이야기라는 느낌도 살짝 있고요. 추리소설 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트릭을 사용했기 때문에 눈치가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중간부터 대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건, 이 소설의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생생함 때문일 거예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부 그녀들의 사정, 2부 그녀들의 거짓말, 3부 그녀들의 비밀. 처음부터 사건이 이미 시작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1부에서 '진노 유카리'라는 주부와 '히무라 마유미'라는 독신녀가 어떻게 얽히게 되는지 보여주고, 2부에서는 시체가 발견되서 경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하며, 3부에서는 계속 오리무중이던 진실이 밝혀지는 식이에요. 소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편이라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2부 제목에 '거짓말'이 들어가다보니 여기서 진실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아니겠구나~ 하는 게 확 보여서 긴장감이 좀 떨어져요. 대신 구성이 어떻게 될지 딱 감이 잡히니까 더 편하게 술술 읽히는 건 있죠.


 한 사람의 어엿한 동반자가 아니라 그저 시댁의 하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유카리 심리묘사가 특히 좋았어요. 마유미 같이 결혼에 안달난 독신녀 여성은 일본 미디어나 대중매체에서 자주 보여주는 편인데, 결혼이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으며 결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실천하는 기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본이나 한국은 여성이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도 없고요. 아니, 주부 역시 직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잡혀있지 않아요. 그러니 이미 결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면, 남들 눈에는 완벽해보이는 결혼생활 속에서 당사자가 어떤 막막한 '벽'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죠.


 "내가 보기에 지금 자기는 그냥 진노 집안의 하녀야. 아내, 아니면 며느리라는 이름의 하녀. 도모는 자기 엄마한테 잘 맞춰 줄 수 있는 몸종이 필요했던 거 아냐?"

 하녀. 그 호칭이 지금의 유카리에게 제일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얘, 오늘은 욕실 청소를 해야겠더라. 얘, 오늘 조림은 간이 너무 짜게 되었구나. 여보, 이 와이셔츠 얼룩 좀 빼줘. - p.112


 읽으면 읽을수록 이 모든 여성들의 공통분모가 되는 남자, 진노 도모아키가 싫어집니다. 극혐이에요 진짜! 아내인 '진노 유카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영 별로였는데, '히무라 마유미'의 범죄 목격담에서 분노했고, 거기에 소꿉친구 '다마나 미도리'의 기억까지 합쳐지니까... 정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거짓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그런데도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에, 의사라는 직업에, 잘생기고 눈치빠르고 운동까지 잘하는 요령좋은 남자니 앞으로도 겉모습과 조건에 혹해 속아넘어가는 여자들이 많겠구나 싶어서 짜증나요ㅠ 이런 놈이 망해버리는 세상이 와야 하는데.. 언제쯤 올까요?ㅠ


 산뜻하게 책을 덮으며 쾌감을 느끼기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아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정의가 실현된 것인가? 하면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진실이 밝혀지긴 하겠지만 그게 제가 바라던 결말은 아니라서 괜히 쓸쓸해져요.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관련된 여자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요. 결국 모든 게 다 '돈'으로 귀착되는 게 현실적이면서도 좀 안타까워요..


 +) 작가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비혼의지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ㅋㅋㅋ 진노 같은 놈팽이한테 속으면서 눈 먼 장님으로 가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느니 이 각박한 세상 혼자 어떻게든 악착같이 헤쳐나가 보겠습니다..!!!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