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
잭 홀런드 지음, 김하늘 옮김 / ㅁ(미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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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데, 저는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라면 당연히 여성이 썼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이 남성인 경우를 주변에서 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세상은 넓고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네요. 작가가 여성 혐오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하면, 당연히 여성 혐오를 정당화할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하며 말없이 윙크를 보내거나 고개를 끄덕였던 수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제발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별과 편견은 자각과 반성 없이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으니까요.


 여성 혐오의 기원을 파헤치고, 그게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는지 살펴보는 과정이 뭐가 중요할까요? 저는 그 이유가 역사와 문화라는 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게, 공기처럼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한국이 이렇구나, 나는 이렇구나, 하는 것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생각해보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말이에요. 딛고 선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보면 정말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막막해집니다. 여성 혐오는 인종 차별보다도 훨씬 더 자각하거나 인지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다못해 신화나 종교 속에서도 온갖 방법으로 여성을 하등하고 미천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잖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살펴보면 '태초에 판도라가 있었다'나 마찬가지죠.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줬다 이겁니다. 기독교를 보면 '하와가 아담을 타락시켰다' 하는 버전이 있고요. 기독교뿐만 아니라 같은 뿌리를 둔 유대교,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반대로 완벽한 성녀를 내세워 실존하는 모든 여성을 모두 비하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요. 저는 성당에 다녔으면서도 성모 마리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의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했는지 전혀 몰랐지 뭐예요. 마리아가 처녀인지 아닌지, 언제 어떤 순간에도 존재했던 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모두 높으신 주교님들의 종교 회의를 거쳐 결정되었다는 거~ 만약 거기서 성모 반대론자 힘이 더 강했으면 지금쯤 마리아라는 '원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


 그리스-로마를 거쳐 기독교-중세-마녀사냥을 짚어보고, 문학과 철학에서 내재화된 여성 혐오를 들여다보면서 그에 영향을 받고 자란 온갖 독재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자궁 취급했는지를 연결시키는 솜씨가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놀라울 지경입니다. 게다가 이런 끔찍한 역사가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 중 하나인 여성의 '신체적 선택권', 즉 낙태에 대한 이슈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볼 수 있어요. 한마디로, 지금 낙태 논쟁은 생명에 대한 논쟁이 전혀 아닌 거죠. 낙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이게 생명에 대한 이슈가 되려면, 그들이 잉태중인 태아 이외에 다른 생명을 똑같이 존중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이 눈만 돌리면 쏟아져 나오잖아요. 막상 태어나 존재하는 생명은 전혀 존중하지 않지만, 여성의 몸 안에 있을 때의 생명만은 존중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어휴.


 혐오와 차별과 편견의 역사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식하고 분쇄하기 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고대부터 굴려온 여성 혐오의 눈덩이가 엄청난 크기로 불어나 우리를 덮치고 있어요. 사실 읽고 나면 좀 막막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촘촘하게 짜여진, 고대 신화부터 일상의 종교까지 온갖 곳을 파고든 여성 혐오를 어떻게 벗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되거든요. 책을 읽기 전에도 알긴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야 잘 봐봐 이건 이런 줄기에서 이렇게 생긴 차별이야, 이걸 극복하려면 인식 자체를 바꿔야 돼, 하고 짚어주는 거랑 그 무게감이 달라요ㅠ 뭐 계속해서 차별해봐라 인류 다함께 멸절밖에 더 하겠냐 싶은 생각도 들지만요ㅋㅋㅋ


 지금 이 후기를 쓰고 있는 순간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버렸네요.. 책 속에 묘사된 탈레반의 정책과 사상을 되짚어봅니다. 그 사상이 탄생하게 된 과정도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제발 무사하기를, 살아남기를,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빌어 먹을 여성 혐오로부터 우리 모두가 탈출할 수 있기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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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 한 권으로 읽는 오리지널 명작 에디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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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카레니나>는 첫 문장이 워낙 유명한데, 번역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달라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 버전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렇게 번역되었네요.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거장의 표현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답니다. 주변을 봐도 그렇잖아요. 행복한 가정은 보통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다들 서로 사랑하고,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뭐 이런 식으로 '큰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죠. 반면에 불행한 가정은 경제적인 문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누가 큰 병을 얻어서,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등등 온갖 방면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보통 대부분의 가정은 행복한 잠깐을 빼면 불행해요. 문제가 없는 상태가 유지되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거장의 작품이라는 게 으레 그렇지만, 사실 작가 자체는 옛날 가치관을 가진 옛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인물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 정말 신기합니다. 통찰력을 발휘하다보니 뜻밖에 인물이 입체적이고 생생해지곤 하잖아요. <맥베스>에서 레이디 멕베스가 그렇고,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그렇죠. 전형성을 탈피하다보니,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판단과는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곤 합니다. 마지막에 안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 누군가는 '사랑을 택해 가정을 뛰쳐나간 여자의 종말'로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안나의 오락가락하는 심리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톨스토이가 결코 자살을 미화한 게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 모두가 모순투성이에 지저분하고 불쾌한 감정의 찌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겁니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 주변인물인 브론스키, 카레닌은 물론이고 심지어 작가가 굉장히 긍정적인 남성상으로 그리는 레닌마저도 그래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여성이 괴로워했으면, 불행했으면 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가 다른 남성이 그녀를 거절해서라는 사실에는 모욕감을 느끼는 모습 같은 것만 봐도 그렇죠.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으면 하는 그런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여과없이 드러납니다. 모두가 서로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될 것 같아요ㅋㅋㅋ 제 안에서 발견해도 싫은데, 남에게서 발견하는 그런 찌꺼기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소설이 아니라 2차 창작된 작품에서는 이만큼 자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할 수가 없어서, 브론스키나 카레닌이 좀 미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고 또 진심이지만, 동시에 안나가 자신의 자유를 전혀 제한할 수 없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안나를 내심 귀찮아하기도 하거든요. 안나와 함께하게 되길 너무나 바랐지만, 막상 그게 이루어지자 별로 행복하지도 않아서 떨떠름해 하고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냥 밀회를 즐기는 상태가 계속 지속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있고요. 그래서 안나가 임신을 고백했을 때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한번도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을 덜컥 입 밖에 내고 나서는 어어, 하고 상황에 이끌려 갑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좀 한심해요. 게다가 안나 이전에 키티를 가지고 적당히 장난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덜컥 그 말을 믿고 인생을 내맡기면 안되는 남자'다 싶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심리를 하나하나 입 밖에 꺼내놓는 게 아닌 만큼, 영상이나 무대로 바꾸다보면 상대적으로 낭만성이 더 강화되는 것 같아요. 문장을 읽다보면 환멸감이 들 정도라니까요!


 안나가 막판에 의부증 비스무리한 상태로 브론스키를 닥달하게 되는 것도, 브론스키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라는 자각이 있어서겠죠.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안나가 설 자리가 너무나 없었다는 게 제일 중요한 이유겠지만요. 안나에게는 브론스키 외에 아무런 사회적 관계라는 게 없잖아요. 여자라서 직업을 따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류층 여성으로서 남은 건 사교계 활동뿐인데 거기서는 지금 아예 배척당하는 상태고, 브론스키 집에서는 아예 브론스키한테 다른 백작 영애 소개시켜줘서 안나 버리라고 압박 넣고... 브론스키 역시 안나를 선택함으로써 잃은 게 있지만 (안나를 계속 만나기 위해 상사 눈 밖에 나면서까지 승진을 거절한다든가) 아직 얼마든지 돌아갈 구멍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나는 정말이지 브론스키가 떠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 상황이다보니 자기가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닥달해놓고 또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고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든 게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건 맞아요. 브론스키가 안나의 시신을 보고 '당신 후회할 거야' 하고 경고했던 안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워낙에 안나가 이런저런 사회적 시선과 오락가락하며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에 고통받으며 '끝'을 바랐던 걸 생각하면, 역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방식이 옳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의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하듯 '이겨내!' 하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텼지만... 그 누구라도 어느 순간에는 끊어집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붙잡아주는 게 주변 사람의 할 일이겠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아마 톨스토이가 지금 다시 태어나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면 결말이 바뀌었겠죠? 지금은 여성에게 19세기보다는 많은 기회가, 많은 관계가, 많은 가능성이 부여된 사회니까요. 언젠가는 안나가 카레닌도, 브론스키도, 죽음도 떨치고 일어나 홀로 서 있는 버전도 한 번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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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파랑, 어쨌든 찬란
케이시 맥퀴스턴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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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충 시놉시스를 보면 감이 딱 오는 이야기입니다. 로맨스라는 장르가 원래 그렇잖아요. 아무리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고 결말은 해피엔딩이 약속되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가 싫어지지는 않아요. 뭐, 로맨스는 사실 그 맛에 보는 거잖아요? 약속된 해피엔딩, 안정감을 주는 판타지를 누리고 싶은 마음. 내가 응원하는 누군가가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거기에 진실한 사랑과 거대한 풍파를 살짝 얹어주고요!


미국 대통령의 아들, 영국 왕자와 사랑에 빠지다

 2019년에 영미권에서 굉장히 핫했던 소설이라는데, 그럴 만 합니다. 로맨스는 '역경과 고난'을 뚫는 과정에서 이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성애 로맨스보다야 퀴어 로맨스가 훨씬 더 직관적으로 현실의 문턱이 잘 보이죠. 사실 평범한 이성애 로맨스였어도 딱히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잖아요. 심지어 작품 속에서 둘은 동성이기까지 하니, 훨씬 더 두렵고 막막할 수밖에 없어요. 단지 나만이 문제되는 게 아니라 내 가족까지도 진창 속에 구르게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니까요.


 영국이 자랑하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 완벽한 막내 왕자와, 미국이 사랑하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섹시한 히스패닉 골든보이. 일단 그림이 죽여줘요. 소설 속에서 둘이 아직 사귀기 전일 때, 그러니까 서로 투닥투닥할 때부터 붙어 있는 모습만으로 SNS에서 '잤네 잤어' 같은 농담(?)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웃겼습니다. 저도 인터넷 상에서 그런 분들을 종종 본 적이 있거든요. 잘생긴 남자 둘만 보면 그렇게 커플로 소비하시는 분들ㅋㅋㅋ 아마 그런 말 하는 본인들도 진심으로 두 사람의 섹스를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점까지도 완벽해요. 나중에 아마 둘이 찍힌 사진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을 응원하는 대중 속에 분명히 있었겠죠ㅋㅋㅋㅋ


열광이냐 비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은 워낙 호모포비아가 심각한 나라여서 영국이나 미국에서 받아들여지는 퀴어를 보면 '아이고 선녀 같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려 있는 듯 보이는 나라에서도 사실 내심 퀴어는 정상이 아니고,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평생을 옷장 안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게다가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온갖 드러운 루머가 판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음.. 나는 당신들 중 누군가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증오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내놓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상상해봤는데, 저라면 솔직히 소설 속 같은 상황에서 커밍아웃할 자신이 없거든요. 물론 헨리와 알렉스 둘도 아웃팅 당한 거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 뒤에 그렇게 용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판타지입니다.


 중간에 둘의 사이가 들킬 뻔 했을 때, 알렉스의 누나인 준이 알렉스 대신 헨리와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한 사진을 올리고 대신 언론에 물어뜯기는 부분이 있어요. 거기서 알렉스의 심정을 묘사하는 문장이 퍽 좋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느냐 아니면 미친듯이 물어뜯느냐 그 차이는 결국 젠더에 있다고요. 그건 상처가 된다고요. 맞아요. 퀴어들이 차별받지 않고 모든 권리를 다 누리는 것 같아 보여도, 이런 식으로 '헤테로 커플이었으면 문제되지 않았을' 부분이 보일 때마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영국이나 미국이 이런데 한국은 어떨까?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오네요...




 로맨스 자체도 재밌었지만 미국 대선 운동을 함께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정치권 관련 얘기도 재밌었어요. 로맨스보다 이쪽이 더 판타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이렇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 싶은 미국 유권자의 열망이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가가 민주당 지지자라 그런지 역대 대통령 얘기 다 갖다 넣어놨으면서 트럼프만 쏙 빼놓고 오바마 뒤에 알렉스 엄마를 당선시킨 것도 넘ㅋㅋㅋ 과몰입판타지였습니다.


 어찌됐든 주인공들은 행복할 겁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이고, 지금 당장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고, 무언가를 대표하는 아이콘적인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실제로 소설과 비슷한 이벤트가 일어나도 좋을 것 같아요. 자기가 느끼는 게 아닌 척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요. 아닌 척 없는 척 은폐하고 표백하는 그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자유롭게 자기를 드러내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멋지지 않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보다, 아니 소설 속보다, 훨씬 더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그런 세계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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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로스쿨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로스쿨 라이브
박재훈 지음 / 들녘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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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로스쿨>은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지만, 그밖에 다른 분류도 조금씩 섞여 있는 책입니다. 수험서도 아니고 입시 정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관련된 정보를 주는 책인 건 맞습니다. 저자 본인이 로스쿨을 다니면서 겪었던 온갖 인간 군상과 생각을 적은 것도 맞긴 한데 (제가 보기엔) 각색도 꽤 들어가서 어느 정도 소설적인 면도 있었고요. 설마 이 책에서 실명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주변인들을 모두까기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ㅋㅋㅋ 한 두명 정도 섞어서, 몇몇 사건을 좀 섞어서, 그렇게 얘기를 했겠죠. 사회비판이 메인은 아니지만 살짝 조미료처럼 첨가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책을 가장 재밌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타깃은 '국가고시를 몇 년 정도 공부해본' 인간이 아닐까 싶어요. 꼭 국가고시가 아니어도 1년에 1번밖에 기회가 없어서, 한방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예 쌩으로 세월을 통째로 날려야 하는 시험이면 해당될 것 같습니다. 전국민이 다 치르는 수능보다는 그보다 몇 년 더 깊게 공부해서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공부를 하고, 통과하기만 하면 일단 커리어가 달라지는 그런 시험이면 해당될 것 같아요. 그런 시험을 준비해보신 분들이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지옥이 바로 그려지실 겁니다. 다들 거기서 허우적대며 괴로워한 순간이 있을 테니까요.


 저 역시 예전에 그런 시기를 거쳐왔던 적이 있던지라,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더라고요. '와 어딜 가나 다 비슷하구나 정말 하나도 안 변하는구나' 싶었어요ㅋㅋㅋ 누구보다 입으로 공정이니 정의니 인권이니 공동체니 외치는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이익만 쫓는 약삭빠른 존재란 점에도 공감합니다. 누구나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내 이익이 침해당하기 전까지는, 입바른 말 하기가 참 쉽단 말이죠. 실제로 뭔가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도 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몇 없어요.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뒷담화나 따돌림에는 눈을 감는다? 정말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물론 나중에는 그런 자신을 어물쩍 잊어버리겠죠.


 읽는 내내 참 웃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법고시의 병폐를 없애겠다고 새로 도입한 제도가 바로 그 사법고시의 병폐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고,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켜야 할 예비 법조인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요. 예를 들면 법대 수업만으로는 사시 패스가 점점 어려워져서 다들 학원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있죠. 수천만원에서 1억 가까운 돈을 투자하면서 로스쿨에 갔는데, 그것만으로는 변호사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어서 학원 강의를 들어야 하는 현실 자체가 엉망진창 아닌가요? 이건 그냥 다른 버전의 수능 같아요. 다들 사교육에 매달리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측면에서는 더더욱이요. 예비 변호사들이 대놓고 저작권법을 위반하며 법률 강의를 듣는 장면은 무슨 블랙 코미디 같다니까요! 어휴.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법조인에 대해 로망을 품고 있고, 앞으로도 품으실 분들은 그냥 이 책은 고이 접어두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로 현실에서 법조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로스쿨 학생들의 현실은 어떤지, 어떤 직업에나 있는 '가까이서 보면 싫은 점'이 무엇인지, 이런 걸 알고 싶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술자리에서 '썰'을 풀듯이 이야기를 늘어놓는지라 굉장히 술술 잘 읽혀요! 


 ...시험이 있는 곳에 부조리가 있나니. 이 지옥을 벗어나는 자 모두 죄인이라!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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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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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이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작품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 갈래 중에 어떤 한 장르를 창조해냈는데, 심지어 그걸 시작하면서 완성해 버렸잖아요. 그 이후로 갈라지는 모든 작품들은 죄다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아닐까 싶어요! 인간이 신을 꿈꾸다 어떤 선을 넘어버리고, 그리하여 결국 예상치 못한 파멸을 맞닥뜨리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과학이라는 구체성을 입혀서 SF라는 장르로 빠지면 이제 <프랑켄슈타인>의 갈래가 되는 거죠.


내가 탄생시킨, 그러나 내가 아닌 생명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덕지덕지 기워 만든 괴물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 같아요)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의 이름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크리처(Creater)'로서 이름도 없이 존재해요. 굳이 번역하자면 '그 생명체' 같은 호칭이 되겠네요. 이름이라는 건 누군가의 아이덴티티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름도 없이 그저 타자화된 존재가 된다는 건, 심지어 이성도 있고 언어도 통하는 존재가 그런 취급을 당한다는 건,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없어요. 


 작가인 메리 셸리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실제로 임신과 유산으로 고통받았다는 점 때문에 1970년대 경부터 페미니즘 비평으로 많이 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탄생시켰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를 노예로 만드는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이 임신한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닮아있다는 해석입니다. 듣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져요. 그저 생명의 탄생, 그에 대한 윤리의식 같은 주제만 생각하다 이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새삼 작가인 메리 셸리가 대단하게 느껴져요. 여성은 당연히 자기 아이를 사랑해야 하고, 모성애는 DNA 속에 새겨져 있어서 타고난 것이라고들 생각하던 시대에 이런 작품을 써내다니요! 


 그런 의미에서 서문이 한 가지 버전인 건 아쉽습니다. 제가 알기로 초판본 서문은 메리 셸리가 아니라 남편 퍼시 셸리가 썼거든요. 책이 처음에 출간될 당시에 여성 작가라는 편견과 벽에 부딪혀 살짝 꼼수(?)를 쓴 것인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메리 셸리가 작가인 게 밝혀진 후에도 한동안 꽤 시끄러웠대요. 여자가 이런 작품을 썼을 리가 없다, 퍼시 셸리가 쓴 거다..!! 자꾸 이런 소문이 돌자 메리 셸리가 두 번째 서문에서 직접 밝힙니다. <한 글자도 남편이 쓰지 않았다. 단, 서문만 빼고>ㅋㅋㅋㅋ 전 이 서문이 너무 좋아요. 서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퍼시 셸리가 정말로 자기가 쓴 책인 것처럼 써놨거든요. 메리 셸리가 쓴 서문을 읽고 퍼시 셸리가 쓴 서문을 읽으면 그 되도 않은 겸양이 박살나는 재미가 있는데, 이 책은 서문이 한 가지 버전만 실려 있어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어요. 물론 초판은 또 초판만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요!


저자는 1831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빅토리아 초기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당시 독자층 비위에 맞추어 등장인물의 성격을 온건하고 보수적인 쪽으로 바꾸었다. 그에 비해 초판은 메리 셸리의 원래 의도가 더 자유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결말이 될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의 공포만큼이나 크리처의 불행에 공감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어서, 크리처의 호소와 논리에 설득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크리처가 복수심에 불타 살인을 한 건 잘못이죠. 심지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하지만 그가 인류 전체를 비난할 때, 바로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 한 구석에서 '맞아 사람들이 먼저 폭력과 배척을 시작하긴 했지.. 인류가 먼저 너를 공격하긴 했지..' 하고 찔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누군가를 죽도록 린치하던 도중에 갑자기 맞던 자가 벌떡 일어서서 폭력으로 대항한다고 쳐요. 이제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만 비난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다양한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을 봐 왔지만,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어떤 버전에서는 영원히 북극에서 서로 쫓고 쫓기며 영원한 지옥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생명을 탄생시키는 비밀을 알아내 자살한 프랑켄슈타인을 살려내 죽을 수도 없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그를 혼자 남겨두는 복수를 하기도 하고.. 정말 다양한 비극이 많았습니다. 원작의 결말은 결국 괴물을 쫓다 쇠약해진 프랑켄슈타인이 죽어버리자, 크리처가 자신을 지탱하던 복수심이라는 삶의 동력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죠.


 혹시 프랑켄슈타인-크리처 이 둘이 혹시 지옥에 빠지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결말은 존재하지 않을까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1) 프랑켄슈타인이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 한다 2) 이 사회가 크리처의 외모만 가지고 그를 차별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3) 크리처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한 비극을 피할 길이 없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2번이 개개인의 선의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라.. 1800년대가 아니라 지금 2021년 이 시대에 크리처가 태어났다고 해도 비극을 피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한 백년이 지나면 그때는 가능할까요? 확신할 수가 없네요..



 정말 흥미로운 서사입니다. 20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모든 고전이 그렇듯 아직도 생명력을 가지고 여전히 생생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에요! 과거를 배경으로 해도, 현대를 배경으로 해도, 심지어 미래를 배경으로 해도 여전히 핵심을 건드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창조와, 탄생과, 이성과, 책임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 메리 셸리의 천재적인 역작 정말 너무 좋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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