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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ㅣ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평점 :
<프랑켄슈타인>이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작품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 갈래 중에 어떤 한 장르를 창조해냈는데, 심지어 그걸 시작하면서 완성해 버렸잖아요. 그 이후로 갈라지는 모든 작품들은 죄다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아닐까 싶어요! 인간이 신을 꿈꾸다 어떤 선을 넘어버리고, 그리하여 결국 예상치 못한 파멸을 맞닥뜨리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과학이라는 구체성을 입혀서 SF라는 장르로 빠지면 이제 <프랑켄슈타인>의 갈래가 되는 거죠.
내가 탄생시킨, 그러나 내가 아닌 생명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덕지덕지 기워 만든 괴물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 같아요)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의 이름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크리처(Creater)'로서 이름도 없이 존재해요. 굳이 번역하자면 '그 생명체' 같은 호칭이 되겠네요. 이름이라는 건 누군가의 아이덴티티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름도 없이 그저 타자화된 존재가 된다는 건, 심지어 이성도 있고 언어도 통하는 존재가 그런 취급을 당한다는 건,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없어요.
작가인 메리 셸리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실제로 임신과 유산으로 고통받았다는 점 때문에 1970년대 경부터 페미니즘 비평으로 많이 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탄생시켰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를 노예로 만드는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이 임신한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닮아있다는 해석입니다. 듣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져요. 그저 생명의 탄생, 그에 대한 윤리의식 같은 주제만 생각하다 이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새삼 작가인 메리 셸리가 대단하게 느껴져요. 여성은 당연히 자기 아이를 사랑해야 하고, 모성애는 DNA 속에 새겨져 있어서 타고난 것이라고들 생각하던 시대에 이런 작품을 써내다니요!
그런 의미에서 서문이 한 가지 버전인 건 아쉽습니다. 제가 알기로 초판본 서문은 메리 셸리가 아니라 남편 퍼시 셸리가 썼거든요. 책이 처음에 출간될 당시에 여성 작가라는 편견과 벽에 부딪혀 살짝 꼼수(?)를 쓴 것인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메리 셸리가 작가인 게 밝혀진 후에도 한동안 꽤 시끄러웠대요. 여자가 이런 작품을 썼을 리가 없다, 퍼시 셸리가 쓴 거다..!! 자꾸 이런 소문이 돌자 메리 셸리가 두 번째 서문에서 직접 밝힙니다. <한 글자도 남편이 쓰지 않았다. 단, 서문만 빼고>ㅋㅋㅋㅋ 전 이 서문이 너무 좋아요. 서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퍼시 셸리가 정말로 자기가 쓴 책인 것처럼 써놨거든요. 메리 셸리가 쓴 서문을 읽고 퍼시 셸리가 쓴 서문을 읽으면 그 되도 않은 겸양이 박살나는 재미가 있는데, 이 책은 서문이 한 가지 버전만 실려 있어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어요. 물론 초판은 또 초판만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요!
저자는 1831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빅토리아 초기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당시 독자층 비위에 맞추어 등장인물의 성격을 온건하고 보수적인 쪽으로 바꾸었다. 그에 비해 초판은 메리 셸리의 원래 의도가 더 자유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결말이 될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의 공포만큼이나 크리처의 불행에 공감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어서, 크리처의 호소와 논리에 설득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크리처가 복수심에 불타 살인을 한 건 잘못이죠. 심지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하지만 그가 인류 전체를 비난할 때, 바로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 한 구석에서 '맞아 사람들이 먼저 폭력과 배척을 시작하긴 했지.. 인류가 먼저 너를 공격하긴 했지..' 하고 찔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누군가를 죽도록 린치하던 도중에 갑자기 맞던 자가 벌떡 일어서서 폭력으로 대항한다고 쳐요. 이제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만 비난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다양한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을 봐 왔지만,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어떤 버전에서는 영원히 북극에서 서로 쫓고 쫓기며 영원한 지옥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생명을 탄생시키는 비밀을 알아내 자살한 프랑켄슈타인을 살려내 죽을 수도 없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그를 혼자 남겨두는 복수를 하기도 하고.. 정말 다양한 비극이 많았습니다. 원작의 결말은 결국 괴물을 쫓다 쇠약해진 프랑켄슈타인이 죽어버리자, 크리처가 자신을 지탱하던 복수심이라는 삶의 동력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죠.
혹시 프랑켄슈타인-크리처 이 둘이 혹시 지옥에 빠지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결말은 존재하지 않을까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1) 프랑켄슈타인이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 한다 2) 이 사회가 크리처의 외모만 가지고 그를 차별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3) 크리처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한 비극을 피할 길이 없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2번이 개개인의 선의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라.. 1800년대가 아니라 지금 2021년 이 시대에 크리처가 태어났다고 해도 비극을 피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한 백년이 지나면 그때는 가능할까요? 확신할 수가 없네요..
정말 흥미로운 서사입니다. 20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모든 고전이 그렇듯 아직도 생명력을 가지고 여전히 생생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에요! 과거를 배경으로 해도, 현대를 배경으로 해도, 심지어 미래를 배경으로 해도 여전히 핵심을 건드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창조와, 탄생과, 이성과, 책임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 메리 셸리의 천재적인 역작 정말 너무 좋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