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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산문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6
조지 오웰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9월
평점 :
이렇게 잘 쓴 글을 읽고 평을 써야 하는 건 난감한 일입니다. 특히나 <조지 오웰 산문선>처럼, 작가가 나쁜 글이 어떤 것이고 제대로 써지지 못한 글은 언어를 오염시킨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으면 더 그래요. '쓸데없는 관용구'와 '막연한 이미지', '그럴 듯하게 들리는 단어'를 잔뜩 나열해놓은 나쁜 글이 언어를 더 나아가 생각을 오염시킨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혹시라도 내가 그런 나쁜 글을 써내는 건 아닌지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이 첫 문단을 쓰는 데에도 꽤나 많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어요. 간결하고 쉬우면서도 정확한 문장- 말은 참 쉬운데, 도대체 어떻게 써야 그렇게 쓸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류 작가의 에세이는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게 돼요.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 이미 충분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거든요. 비판자들에게 공격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글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잖아요! 조지 오웰은 영국의 제국주의를 매우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파시즘에 대항해 평생 싸운 작가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걸 알고 있죠. 그런 상황에서 [코끼리를 쏘다] 같은 글을 세상에 발표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총을 든 영국인'이 '총을 들지 않은 인도인 무리'에게 떠밀려 억지로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는 건, 마음만 먹으면 악의적으로 곡해할 여지가 엄청나게 많은 상황이잖아요. 당신 말대로라면 지배계층이나 독재자 역시 대중의 욕망에 떠밀려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떠밀렸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요. 물론 조지 오웰은 왜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 아주 솔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비판의 여지는 존재합니다. 조지 오웰 본인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없어요. 정말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진실이었으니까, 그걸 글로 남긴 거죠. 정말 대단해요.
이 책을 집어들면서, [나는 왜 쓰는가]나 [교수형], [부랑자 임시 수용소] 같은 글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워낙 정치색이 뚜렷한 작가라 에세이도 그런 성향의 글이 많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책의 순서를 살펴보면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들이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어요. 아마 저 같은 독자를 노린 거겠죠? 급진적이고, 계급주의를 비판하고, 파시즘을 걱정하는.. 정말 딱 조지 오웰스러운 글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이야기는 의외로 적은 편입니다. 작가로서 언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면서 애국심에 대해 고찰한 글도 있어요. 웬만한 작법서보다 더 뼈때리는(!) 내용도 있어서 작가가 되고 싶으신 분들이 작법서를 살펴볼 때 보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소년 주간지] 같은 글이 점점 논리적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할 때 무척 재밌었어요. 그저 잡스러운 글이라고 아무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대중 잡지를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했습니다. 사회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 아닐까요? 상류층의 생활을 누릴 일이 없는 하류층일수록, 그 문화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동조하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저 역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귀족적'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워낙에 그 말이 칭찬으로 통용되는 걸 많이 봐와서 무의식적으로는 귀족적인 건 우아하고, 여유롭고, 멋지고, 세련된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릴 적에 받았던 온갖 대중문화가 그래서 더 중요하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한 작가라 글이 명료해서 좋았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사회와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걸 정말 엄청나게 잘해요! 읽는 내내 조지 오웰이 평생 소설을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수필가로서 이름을 날렸겠다 싶었습니다. 능력있는 작가가 쓴 에세이를 읽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괜히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지게 만든다니까요. 아직은 그러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그러고 싶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