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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1년 4월
평점 :
'역사'는 아주 거대한 개념입니다. 현재를 생각해봐도 그렇죠. 우리가 지금 아는 대부분의 정치인, 대부분의 유명인은 몇십 년이 지나기만 해도 금방 잊혀질 겁니다. 우리가 지금 1950년대의 국회의원이 누구누구였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과 똑같죠. 너무나 많은 인물과 사건과 시간을 짧게 욱여넣어야 하다 보니, 정말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지 않으면 역사에 이름 한 줄 남지 않게 되는 거예요. 당연히 어느 시대에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들이 수도 없이 깔려있어요.
저는 항상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의 이야기가 궁금했어요. 왜냐면 저 역시 그런 평범한 일반 대중 중 하나인데, 세상은 온통 유명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 이야기만 하잖아요. 과연 생리대가 발명되기 전 여자들은 어떻게 생리를 처리했을까요? 혹시 이런 거 궁금해하신 적이 있나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과서 그냥 실제 그 때의 삶이 어땠는지 한 번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하신 적 있나요? 만약 있다면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정말 잘 맞으실 거예요ㅋㅋㅋ (아, 참고로 이 책에 저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역사 교과서나 역사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의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어요. 일기니까요.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를 만났고, 그래서 나는 기분이 어땠고, 일의 전말은 이러이러한데 이게 저러저러하게 해결이 되었다, 같은 소소한 일상이요. 물론 사화(士禍)와 같이 엄청난 일에 휘말리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보다 보면 그 역시 인생의 굴곡 중 하나처럼 느껴집니다. 저자가 머리말에 쓴 바에 의하면,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의 개인 일기만 해도 1431건에 이른다고 해요. 그 많은 일기를 모조리 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특정한 몇 명의 인물을 따라가며 조선 사회의 천태만상을 들여다봅니다. 사람 사는 게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보니, 8명 정도의 인물만 따라가도 책 한 권이 뚝딱이에요!
당시의 과거시험 문화, 관료제 사회의 신고식, 가족을 애틋해하는 마음, 부동산에 얽힌 싸움 등등 현대에도 일어나는 일이 고스란히 과거에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제도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그 안에서 아옹다옹 하는 모습이 정말 똑같다니까요! 그만큼 인간의 습성 자체가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겠죠? 개인적으로는 노비가 양반을 속이고, 골리고, 반항하고, 욕하는 모습이 담긴 장이 정말 재밌었어요. 막연하게 '노비는 항상 양반에게 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신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실제로도 상당히 많은 경우 그랬겠죠. 하지만 의외로 양반에게도 노비가 꼭 필요한 존재라서, 막상 자기에게 덤비는(?) 노비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끙끙 앓는 양반의 모습이 신선했어요.
그리고 남의 일기, 그것도 짧게 발췌된 일기를 보면서 울게 될 줄 몰랐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어린 딸이 꿈에 나왔다는 글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찡하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꿈 내용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앞서서 계속 이 아이가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많이 아팠고, 얼마나 살리려고 애를 썼고, 그러나 결국 죽었고.. 하는 부분을 봐 와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토록 지극히 애정했던 자식이 죽은 뒤 2년 만에 꿈에 나타나, 꿈에서 깬 뒤에 아내와 함께 부둥켜 우는 모습이 정말 짠했습니다. 가족 간의 애정과 그리움은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이어서 더 공감이 갔나 봐요.
한 가지 아쉬운 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게 '양반 남성'으로 한정이 되는 사회이다 보니 남겨진 목소리가 죄다 지배계급 성인 남성이라는 겁니다. 평민 아낙이나 노비 소년의 이야기 같은 건 일기에 아주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등장 가능하고, 사실 그마저도 거의 없습니다. 작가도 그 부분을 아쉬워하고 있어요. 중간에 글을 읽고 쓰지 못해서 눈 뜨고 코 베이는 농민도 나오는데,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왜 과거에 '글'이라는 게 권력의 수단이 되었는지도 새삼 느껴지고요.
맺음말을 읽어 보니 전작에 비슷한 시리즈(?)처럼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이 있나 보더라고요. 일기 버전을 읽고 났더니 편지 버전도 읽고 싶어졌습니다. 흥미진진한 역사 썰을 팩트에 기반해서, 사료를 첨부해가며 들려주는데 어떻게 좋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ㅋㅋㅋ 할아버지에게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어린 아이처럼, 저도 작가님에게 후속작을 달라고 조르고 싶어집니다. 다음편 주세요! 다음! 다음!ㅋㅋㅋ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