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과반이 붕괴되었고 노동당은 30석 가까운 의석을 새로 가져갔다. 여전히 압도적인 제1당은 보수당이지만, 노동당은 궤멸 직전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해서 차기 총선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깊은 일은, 노동당이 이번 선거의 의제를 주도하며 전체적인 정치 지형을 왼쪽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면 승부해서 돌파해내었다는 것이다. 투표권은 없지만 나는 영국 노동당 당원이고, 또 소액이긴 하지만 노동당에 기부도 하여서 노동당의 이번 선전이 무척 기쁘다.
1. 보수당 메이 총리의 조기 선거 요청. 보수당은 이미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브렉싯에 대한 대권도 의회를 통해 다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왜 메이 총리는 조기 총선을 의회에 요청한 것일까? 오로지 노동당을 궤멸시키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당시 보수당은 지지율에서 노동당을 2배 이상 앞서고 있었고 당장 선거가 치러진다면 최대 과반 + 80, 90석 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못해도 과반 + 40, 50석.
2. 메이는 이번 선거가 브렉싯에 대한 것이며, 브렉싯 협상을 하는데 자신이 적임자이냐 노동당 당수 코벵이 적임자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선거 모토도 스트롱 앤 스테이블 리더쉽이었다. 보수당에서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 뒤 배경에는 코벵 얼굴이 폭탄과 함께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보수당이 선거에서 과반을 잃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다.
3. 한국에서 문재인이 언론의 집중 포화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코벵도 각종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아왔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비비씨 등 방송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에 비비씨 등 모든 방송사는 거의 똑같은 장면을 내보냈다. 거리의 노인들에게 총리 감으로 누가 나으냐고 묻는 것이다. 영국 노인들은 압도적으로 메이를 지지하기 때문에 답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았다. 다행히 선거 전에 돌입하면서 방송들은 어느 정도 균형감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노동당에 대한 지지도도 올라갔다.
4. 노동당 선거 공약이 확정되기 전에 언론에 누출이 된 일이 있었다. 공약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느낀 노동당 내부 사람의 소행인 것 같다. 한 바탕 난리가 난 후 코벵은 언론에 누출된 공약을 그대로 수정 없이 확정시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공약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약 공식 발표 시점 후 노동당의 지지도는 확실히 상승세를 보였다.
5. 반대로 보수당의 공약은 나오자 마자 역풍을 맞았다. 가장 큰 것은 노인들에 대한 의료비 부담을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떠넘기는 정책이었다. 논란이 일자 공약 발표 5일 만에 메이는 정책 후퇴를 표명해야 했다. 그러므로 스트롱 앤 스테이블한 리더쉽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6. 메이는 코벵과의 일대일 토론은 물론이고 정당 대표간 티브이 토론도 거부했다. 당연히 이 역시 보수당에 역풍이 되었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메이는 쉽게 흥분하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구체적인 질문에 피상적인 대답으로 도망만 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솔직히 박근혜가 생각이 났다. 술술 말은 잘 하는 박근혜. 그러나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는.
7.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두 번의 테러가 났다. 런던에서 테러가 있은 후 메이가 내무부 장관 재직 시절 경찰의 수를 줄였다 든지 하는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안보는 보수라던데 사실은 그도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8.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발악을 했다. 선거날 가게에 뭘 사러갔는데 거기 걸려 있는 신문 헤드라인이 "메이에게 투표하라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보게 될 것이다" 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신문들, 대표적으로는 썬의 구독자의 대부분이 워킹 클라스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계급 이익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하는 신문들을 그토록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저 신기할 뿐이다. 토론회에서 코벵이 학비, 학생들 급식비, 공공 의료 투자 등등에 대해서 말할 때 객석에 앉은 코벵 반대자들(중년의 남자들, 가난해 보이는-.-)은 유사 사태 때 핵미사일 버튼을 누룰 것인가 말 것인가 등에 대해 집요하게 묻더라. 그것이 그대들의 삶과, 그리고 그대의 가족, 이웃들의 삶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북한이 없으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차질 없이 발전될 수 있을까? 전혀. 어떻게든 절대적인 적을 만들어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념이란 이토록 나쁜 것이다.
9. 이번 총선은 세대 대결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렇듯이. 노동당은 젊은 층에서, 보수당은 노년층에서 압도적이다. 선거 전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이 격차를 상당히 줄인 상태였지만 선거 결과를 누구도 쉽게 예단하지 못했던 것은 젊은 층의 투표율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총선 정도의 젊은 층 투표율(42%)을 기록한다면 보수당의 압승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젊은 층이 많이들 투표에 참여 한 것 같다. 여기엔 코벵이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층의 큰 호응을 받고 있었고 롹 콘서트 장 중간에 들어가서 위화감없이 아주 선동적인 연설을 할 수 있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10. 이번 선거로 직접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많이 바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보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현실적으로 말해서 5년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