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국을 사랑한다. 영국의 자연, 영국의 기후, 피쉬앤칲스, 펍, 소박하고 실용적인 사람들, 런던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 등등을 사랑한다. 내가 런던에 산다면 나도 런더너다. 반면, 내가 파리에 산다고 파리쟝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열려있음이 영국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완벽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테레비젼에서 런던에 사는 이방인들을 인터뷰한다. 이네들의 심정은 한 마디로 정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정을 붙일 일이 없다면 정 떨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탈퇴파 인사들은 아직도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 영국이 EU 안에 있으면서 누리던 모든 혜택은 그대로 누리면서 이제 영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golden opportunity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웃으면 된다. 어짜피 이걸 믿는 사람도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영국의 미래는 매우 분명한 것 같다. 즉, 영국은 EU 밖에서 EU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분리 불가능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나는 북아일랜드 문제다. 만약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이 EU의 경계선이 되어 사람들의 이동이 통제된다면 북아일랜드의 지금도 위태로운 평화는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은 EU에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에 대한 현상 유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또, 영국은 금융업으로 먹고 산다. 그러므로 금융업을 지켜내기 위해서 영국은 EU에 영국의 금융 영업 라이센스만 가지고도 EU에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즉, EU 단일 시장에 대한 접근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반대 급부로 EU는 노동 이동의 자유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영국이 EU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제외하면 말이다.

 

영국의 탈퇴가 EU 해체의 계기가 될까? 내 생각에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경제 강국이자 강력한 자국 통화를 갖고 있는 영국도 EU를 탈퇴하면서 휘청이고 있다. 자국 통화를 갖고 있지 않은 다른 EU 국가가 EU 탈퇴를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망상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EU 입장에서는 항상 징징대고, 예외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영국이 EU를 탈퇴함으로써 EU의 결속력을 더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쪽에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

 

영국의 EU 탈퇴 결정의 결정적인 문제는 역시 이민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이민 문제는 일종의 매맞는 아이에 불과한 것 같다. 영국의 정치인과 언론은 영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덮기 위해 EU나 이민자 문제를 들먹여 왔다. 뉴스를 보니 콘월 지역은 탈퇴가 우세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EU 보조금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영국의 낙후된 지역은 EU의 보조금으로 개발 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는데, 바로 이런 지역들에서 탈퇴 요구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또, 이민자들이 영국 경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고까와 한다. 내가 아는 분도 영국에 투자 이민을 왔다. 집 사고, 세간 사고... 등등 한국에서 번 돈을 영국에서 어마어마하게 쓰고 있다. 영국인 직원도 최소 세 명 고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3년 있다가 심사해서 통과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국에 돈과 기술을 들고 오는 이민자들이 엄청 많고, 영국은 이들의 수를 결코 줄일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영국의 국립 의료 서비스는 만성적인 일손 부족에 시달린다. 진료 받으러 갔다가 두 어 시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필리핀까지 가서 간호원 등을 모집해 온다. 동구권에서 의사들도 많이 데려온다. 그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서민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민자들 나가라는 선동에 휘말려 영국의 EU 탈퇴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잉글랜드, 웨일즈의 화이트 워킹 클래스만 비난할 수는 없다. EU의 교두보로 영국은 해외의 어마어마한 투자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투자는 거의 런던에만 집중되고 있다. 런던과 런던 이외의 지역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만 있다. 런던 이외 지역의 산업은 경쟁력도 없고 이미 공동화된 곳도 많다. 얼마 전 제철소가 문닫는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중요 산업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고 실업 때문에 지역 경제가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 그 제철소를 보고 난 내 느낌은, 저렇게 낡고 영세해 보이는 공장이 어떻게 여태까지 돌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본 한국 포항제철의 시설이 훨씬 현대적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북부의 어느 동네는 동네 사람이 거의 전부 복지 수당에 의존해 살고 있는 곳도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도 있다. 테스코같은 대형 할인 매장 계산대 말고는 일할 곳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을 잃어갈 때 악마와 같이 접근하여 이 사람들을 하이잭 해 가는 세력들이 바로 보리스 존슨과 같은 포퓰리스트이고, UKIP과 같은 극우당이다.

 

영국의 극우당인 UKIP은 대기업, 런던의 은행가들, 기득권 세력, 영국 의회의 정치꾼들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극우당이 원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머릿수, 그리고 그들의 분노 뿐이다. 기업가들과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UKIP의 경제 정책이 기업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EU 지향적인 도시인 런던의 시장을 역임한 보리스 존슨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진정으로 EU 탈퇴를 원했을까? 사람들은 보리스 존슨이 수상이 되고자 하는 야망으로 EU 탈퇴 운동을 주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이번 사태의 정확한 양상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포퓰리스트들이 하이잭해 간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대선도 이렇게 될 위험이 있다. 뜻밖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와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당히 겹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의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래스가 기득권 층을 뒤엎고자 유일한 대안인 트럼프를 지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결코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아마 히틀러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영국 정치권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는 좀 더 복잡한 측면이 있다. 워킹 클라스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어마 어마한 성취 동기로 가득 차 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고 하여 계급 상승을 이뤄내려 노력한다. 영국에 이민오는 사람들도 어마 어마한 교육열로 중무장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워킹 클라스에는 바로 이런 동기 부여가 없다. 이 사람들은 상위 계급으로 상승한다는 관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나이고 이것이 나의 인생이고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왜 내가 아득 바득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가? 그렇게 산다고 하여 내가 더 행복해 지는가? 영국 워킹 클라스의 이런 세계관은 빌리 엘리어트, 히스토리 보이, 에듀케이션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이들의 세계관을 존경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시대가 이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일반 공립 학교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화이트 워킹 클라스 남자 아이다. 이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동기 부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공립 학교보다 상위의 학교는 이민자들의 자식들로 채워진다. 화이트 워킹 클라스 부모들은 아이를 준비시켜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 개념 자체가 없고, 그러므로 그런 정보를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튼 스쿨과 같은 최상위 학교는 거의 화이트 귀족 계급의 자식들로 채워진다. 내가 아는 분이 아들을 어찌어찌해서 이튼 스쿨에 보냈는데, 개교 모임때 보니 학부모들이 거의 화이트에 귀족스러운 용모를 갖추고 있더라고 하더라. 영국의 화이트 워킹 클라스는 바로 이러한 이중의 좌절 속에 놓여 있다. 영국 정부는 이들 화이트 워킹 클라스 사람들을 잘 교육시켜서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고 싶어한다. 한국이나 중국의 교육 제도를 참고하여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번번이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왜 우리를 자꾸 미들 클래스로 올린답시고 압력을 주는가! 문제는 워킹 클라스 문화, 그리고 그것의 뿌리인 계급 사회에 있기 때문에 영국이 이 문제를 쉽게 풀지는 못할 것 같다. 적어도 몇 세대는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음... 사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어제 테레비젼에서 영국 노동당의 리더 제레미 코벤의 연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벤은 현재 위기의 남자다. EU 잔류 운동을 시원찮게 했다는 이유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야당 예비 내각의 2/3 정도가 이미 사임한 상태고 오늘 아마 불신임안이 통과될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코벤을 노동당의 리더로 만들어준 젊은 지지자들이 어제 의사당 앞에서 번개를 했고, 코벤은 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코벤은 영국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대처하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다. 노동당 의원들은 코벤으로는 선거를 이길 수 없으니 물러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당이 집권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일까? 노동당이 갖고 있는 비젼이 있을까? 내가 보기엔 제레미 코벤이 곧 비젼이다. 제레미 코벤을 축출하고 나면 노동당은 다시 비젼 없는 정당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제 젊은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한 코벤을 보고 아내는 바로 노동당에 가입했다. 나는 잉글랜드와 아이슬랜드의 축구 경기를 보느라 가입하지 못했다. 영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시대의 문제는 워킹 클라스, 즉 서민들을 포퓰리스트에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내는 것이다. 나는 영국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