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기사와 알파고와의 대국.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의견을 기록해 두려 한다.
(총 5국 중 3승1패로 알파고가 승리를 확정한 상태란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는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바둑의 최고급 수준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었다가, 알파고가 3연승을 하는 와중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가 거의 바둑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세돌 기사가 한 판을 이긴 후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도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이번 대국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아마도 이세돌은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1). 인공지능 바둑 기계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혹은 장래의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될 수 있을까? 이는 물론 사고나 감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에 따라서는 주판도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의식의 현상으로서의 사고와 감정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알파고는 학습형 기계라고 한다. 승리라는 목표(미래)가 주어져 있고, 학습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거)이 있고, 대국의 각 순간은 이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개입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알파고가 학습형 기계라는 것은 과거가 미래를 일의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파고의 이러한 모습은, 몇몇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에 고유한 것으로 이야기하던 탈자적 특성과 유사하다. 즉, 자신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양상. 요컨대, 알파고는 자신의 과거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를 갖고 있다.
생명체의 어느 수준에까지 의식적 특성을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등 수준의 생명체에 대해 의식적 특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알파고도 의식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인간 수준에서의 의식적 특성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의식의 한 현상으로서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 자아의 문제가 개입할 것이다. 즉, 알파고는 자신에 대한 어떤 상을 갖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파고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아는 타자를 전제한다. 즉, 자아는 타자에 대해 자신을 외면성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그 외면성이란 자신의 신체를 말한다. 알파고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의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분명 부정적인 답을 줄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알파고는 아직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래에는? Who knows?
2). 아마 이번 대국은 미래의 역사학자에 의해 프로페셔널리즘의 종말의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바둑을 더 잘 둘 수 있는 한에서 최고의 인간 기사를 가리는 이벤트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아주 멀지 않은 장래에 이족 로봇이 축구나 야구 등의 프로 스포츠 경기에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도 그렇다.
이런 판국에 170km를 던지는 인간 투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뽑아내는 천재 작곡가, 고도로 세련되고 정교한 색채 감각을 자랑하는 화가... 등등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하고, 그렇게 최고에 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시합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스런 일이다.
장래는 아마추어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3). 작년에, 중학교 다니는 동네 아이가 로봇이 대체하지 않는 직업이 뭘까 하며 고민하는 소리를 하기에 웃은 적이 있다. 이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테스코 계산대를 추천했었다. 얼마 전 씨엔엔에서도 로봇이 대체하지 않을 직업에 대해 방송하더라. 나는 또 웃었다.
그러나 이번 대국 관련 기사에서는 웃지 못하겠더라. 지금 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의 90%는 직업을 잃게 되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렇게 예상되는 장래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90%의 인류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공급이 무한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무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을 돈을 매개로 사고 팔아야 하는가? 자본주의식대로라면 90%의 인류가 실업자인데 그 무한한 공급에 대한 수요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 두 가지 극단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하나는, 에스에프 영화에서 많이 봤듯이 장래의 세계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사는 폐쇄된 도시와 그 밖의 빈민굴 영역으로 나눠지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물품을 구할 수 있는 공산주의식 사회가 되리라는 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이 두 극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첫번째에 가까울까? 내 생각에 첫번째 그림은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역사에서 운동에 어떤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동이란 첫 번째 그림을 옵션에서 지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나는 오래 살아서 미래의 사회를 보고 싶다. 내가 전사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