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로 읽는 것은 사르트르다. 사르트르가 쓴 책들, 사르트르에 대해서 쓴 책들. 어찌 보면 좁은 영역의 사르트르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이었는데 이제 사르트르는 내 앞에 너무 넓게 펼쳐져 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서 감정이나 의식 이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접근했었다. 나의 제일 철학자는 스피노자다. 나는 스피노자의 감정, 의식 이론이 너무 개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의 이론들에서 구체적인 것을 보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미권의 감정, 의식 이론들은 너무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르트르에로 관심을 돌려 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철학자가 그렇듯이 사르트르 역시 총체적 이해를 요구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사르트르의 총체적 철학적 기획은, 어떻게 한 인간을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존재와 무"는 이러한 기획의 한 평면만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심리학적 측면. 만약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의 기반 위에서 인간의 사회, 역사적 지평을 구축하려 했다면 그는 거대한 실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이후에 "존재와 무"와 교접하는, 별도의 평면을 구축해 나갔다. 그렇게 하여 사르트르의 기획은 입체적인 것이 된다. 인간 이해에 있어 심리적 측면과 사회-역사적 측면을 아우르는.

 

사르트르를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분명해지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존재와 무"는 이런 기획의 총체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폐기하고 후기 철학으로 나아갔다가 말년에 다시 자신의 초기 철학으로 귀환했다는 식의 사르트르 이해만큼 졸렬한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존재와 무"는 사르트르의 총체적 기획의 유효성의 여부에 따라 유효성 여부를 판정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어폐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의 유효성 여부를 따지며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철학의 고전이다. "존재와 무"도 마찬가지다. "존재와 무"를 이십세기에 출간된 가장 위대한 철학서 중 하나로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사르트르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이유는 이렇다. 내가, 혹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사르트르는 고전으로서의 사르트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1980년에 죽은 아주 당대적인 사람이다. 우리의 당대를 철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다. 그 중 사르트르는 그 경쟁에서 분명히 낙오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평가가 섣부른 것이었을까? 만약 사르트르의 철학적 기획이 경쟁적 이론들과 동등하게 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성찰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그 체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와 무"의 유효성도 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러한 평가 작업은 너무 거대하다. 그러므로 셋째, 만약 사르트르에게서 아주 작은 약속의 빛이라도 발견될 수 있다면, 적어도 내게 그 빛은 이런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탐구는 그의 철학 경력 시작부터 끝까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었음을 나는 거듭 확인하게 된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건전한 태도에서 그의 철학의 긍정성을 기대한다. 현재로는 이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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