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핑을 하다가 어떤 철학자 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인생의 의미와 같은 거창하고 오만한 질문을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라.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반발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첫째, 이 철학자의 충고 자체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한 답이다. 왜 자신만의 답을 타인에게 강제할까? (이 분은 기분 나쁠 정도로 강요투였다.)
둘째, 질문의 제기 또한 삶의 진실된 순간이고 삶의 진실된 감각이다. 사춘기 아이가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아이가 겪고 있을 상황과 이 질문이 별개일 수 있을까? 타칭 꼰대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 이 꼰대가 처한 상황과 이 고민이 별개일 수 있을까?
셋째, 특히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질문을 금기시한다. "나의 삶"에 대해 고민할 때 주위 사람들은 부모를, 자식을, 회사를 생각하라고 입을 모은다. 더 이상 "인생의 의미"와 같은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넷째, 질문은 추상적이고 감각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아직도 이런 이분법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구체의 의미는 항상 추상에서 얻어진다. 추상의 의미 역시 구체를 통해 얻어진다. 추상은 추상일 뿐이고 구체는 구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2. 신해철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튭에서 그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즐겨 듣던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신해철은 아이디어가 넘치고 웅장한 사운드를 좋아한 음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해철에게는 조용필이 갖지 못한 강점도 있었다. 바로 가사를 쓰는 능력. 유튭에서 들은 많은 곡들에서 그의 가사는 심각하다 할 정도로 일인칭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가 철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환기하게 되었다.) 심지어 말랑 말랑한 대중 가요라고 할 수 있는 "안녕"이라는 곡도 그렇다. 겉보기에 이 노래는 돈만 밝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한풀 더 들어가 보면 "꿀"이나 "돈"을 쫓는 삶이 아니라 "꽃"이나 "Lover"로서의 삶, 즉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신해철의 가사는 유치하게 들리기도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 토로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유치하게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어느 선에 이르고 나면 그러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신해철은 거침 없이 이런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예술가란 이런 질문을 일상에 잠긴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퍼부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 아닐까? "인생의 의미"와 같은 타부시되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제기하여 우리들 굳건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굳건함의 일부에 균열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신해철이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곤 하는 신해철에 나는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왜냐하면 (사르트르를 인용하면)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