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막 다 읽은 참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그렇다. 처음 헌책방에서 사서 가볍게 읽었을 때는 지루하기만 하고 아무런 감응이 없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책에 줄을 쳐가면서 읽었던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에 호러블하다고 코멘트해 놓은 게 있다.


이번 읽을 때 이 책은 확 달라져 있었다. 문장 하나 하나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섬세함을 포착하지 못한 나의 정신의 둔탁함에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하이데거는 그 명성으로 나의 주의를 두번, 세번, 네번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하이데거에 대해 서핑을 해보다가 하이데거의 일기가 출간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 귀절도 있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는 자신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세계 유대주의가 서구의 근대를 추진한 주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또 노트에서 하이데거는 "세계 유대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관여할 필요가 없는 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최고의 피를 희생해야만 했다"고 적었다.


또 철학노트는 하이데거에게 반유대주의는 미국과 영국 문화에 대한 강한 적의와 겹쳐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런 문화를 '조작을 통한 지배'라고 부르는 것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한 구절에서 하이데거는 파시즘과 세계 유대주의처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영국 의회주의는 서구의 근대를 비인간적으로 만든 추동력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볼셰비키즘의 부르조아 기독교적 형상은 가장 위험하다. 그것의 파괴가 없다면 (부정적 의미의) 근대의 시대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출처는 레디앙. 2014년 3월13일자 가디언 기사를 대부분 참조한 기사인 것 같다.)


아마 이 귀절들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이 별안간 훤해지는 느낌을 받은 사람도 있으리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원, 망각, 그리고 회복. 회복은 망각을 거슬러 시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대결하고, 해체하여 근거없음을 밝히려 애쓰고 있는 사유가 바로 그 망각의 사유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어쩌면 저 일기의 귀절들이 하이데거 왈 망각의 사유의 구체적 참조점들 중 일부를 지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말로 이렇다면 하이데거는 철학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 순진해서 나치에 동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나치 동조와 관련해서 변명만 해대는 것을 보면서는 인간적으로 덜 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 일기의 귀절들은 하이데거가 나치와, 방법과 분야는 달라도, 실지에 있어서는 동일한 심정에서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의 사상이 많은 유태인 사상가들을 포함한 좌파 사상가들에게 특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독일 계통 사상가들의 정서적으로 특징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 역시 현대의 과학주의와 영국 문화의 피상성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의 철학적 투쟁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의 권리를 확보하고 그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촌스러운 보수주의자일 수도, 신비주의자일 수도, 시대착오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기본 성향일 뿐이니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성향이 더 심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정치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결하고자 하는 사유가 어디에 귀속되는지 명확히 정의해 놓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그의 나치 입당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치는 망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치와 동일한 고민에서 출발한 하이데거의 사상은 여전히 현대의 가장 심오한 사상으로 남아있다...


하이데거에 대해 서핑을 하기에 전에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반짝 반짝 빛나는 문장들에 대해 포스팅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헛헛 헛웃음이 나온다...


(혹 댓글이 있어도 대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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