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친구 A가 휴가를 받아 놀러왔다. 영국에서 7년 살다가 직장 접고 한국에 가서 1년여 살았고, 이제 8월달이면 다시 영국에 올 계획이란다. 영주할 생각으로. 다른 친구들도 불러서 우리 집에서 중국 요리를 시켜 먹었다.

한국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친구 A의  아이는 초등학생. 2살 때 영국에 왔지만 집에서는 한국어만 썼기 때문에, 어눌하긴 하지만 한국어를 곧잘 한다. 이번에 한국에서 1년 정도 산 셈인데, 한국어 발음이 무척 좋아졌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경험시켜 주고 싶었다고 했다. 세월호 때문에 아이가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단다. "영국에서 크루즈 탈 때는 구명복 입는 법, 어디서 구명정 타는지 다 훈련 받았는데, 세월호는 그런 훈련을 안해서 사고가 난 것이다." 

친구 B의 아이는 이제 4, 5살. 영국에 온지 1, 2년 정도 되었는데, 아이가 자꾸 영어로 말하려고 한단다. 즉슨, 영국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 B는 아이가 영국 시민권을 따고도 한국에서 군대를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단다. B는 장교 출신이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니 B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대부분의 한인에게 영국은 남의 나라다. 영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한인들도 성인이 되고 나면 한인 친구들만 친구로 남는단다. 영국에서 좋은 대학을 마친 한인들도 한국 회사의 현지 법인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 여기 사람들에 섞여들어 주류에 진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영국은 '이런' 사회적 이동성에 관한 한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이다. 프랑스에서 10년을 산 한 친구는 영국 테레비젼을 보고 놀란다. 앵커가 흑인이었으니까. 프랑스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면서. 영국 뉴스에서는 이슬람식 머리 수건을 쓴 여성 리포터도 볼 수 있다. 

한인들도 영국 사회와 긴밀한 접촉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장기적으로 영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닌 것 같고, 사실 앞으로도 잘 모르겠다. 

거칠게 말하면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열외의 시민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열외의 상황이 편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항구적인 조건으로 열외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B가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어떤 상황이 되든, 영국 사람으로서든, 한국 사람으로서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아이가 구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영국 사회가 진입하기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세월호 사태가 폭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사실은 한국 사회가 신뢰도 제로의 사회라는 것일 것이다. 도처가 다 그렇다. 심지어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한 한국 전통 건축물 복원에 있어 최고라는 장인도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은 세월호 선장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다 돈 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신뢰가 붕괴된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인터넷 댓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말한다. 그러나 이민은 결단코 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민을 할 정도면 한국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거나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영국으로 이민을 온다면 영국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체성을 갖는데 무한히 힘들 것이다. 즉, 영국이 남의 나라로 느껴질 것이다. 한 사회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상당량의 행복감은 그런 정체성의 분열을 통해 날아가 버린다.

실력 있고 생각 있는 사람들이 한국을 많이 떠난다면 한국 사회를 분열시켜 가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겨 온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세월호 사태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참 많다는 것 아닐까?

내가 요즘 사는 책의 90%가 채리티 샵(기부 물품을 판매하는 자선 사업 가게)에서 산 것이다. 일반 서점에서는 못 보던, 한국 관계 책들도 서너 권씩 나온다. 그러면 꼬박 꼬박 산다. 어제 산 책은 전통 사찰에 대한 책이었다. 영국 사람이 쓴 책인데 인쇄는 한국에서 했다. 숭산 스님과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그러나, 오탈자도 많고 책 구성이 엉망이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서문이 인트로덕션과 상당히 겹치는 등, 실력이 문제건 성의가 문제건 문제가 많았다. 나는 좀 창피했다... 이런 것만 봐도 느껴지는 게 분명히 있다. 한국은 아직 할 일이 많은 나라라는 것. 

정치에서건 문화에서건 한국은 손 댈 곳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많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고,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젊고 창의적인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있는 나라다. 물론, 무능하고 윤리의식이 결여된 기성세대가 곳곳에 눌러앉아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러므로 젊은 신진 세대들은 우선 그 장애물을 우회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같은, 이미 늙어 버린 사람은 마땅히 귀명창이 되어야 하겠지.

(우회하는 법. 이번 지방선거 기사에서 서울의 박원순, 충남의 안희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한 사람은 지명도 떨어지는 시민 운동가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노 중의 친노로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서울 시장이 될 수 있었고, 충남 지사가 될 수 있었을까?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지자체장이 되었고 이번에 재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한나라당 성향 사람들도 이들을 지지한다는 것. 예를 들면, 박원순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강남 구들에서 서울 평균보다 높은 지지율을 받고 있다는 것. 어떻게? 강남 지역에 적당한 경제적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안희정도 충남에 많은 투자를 끌어오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그렇게 야금 야금... 우리가 노무현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것.)

(혹시 댓글이 달려도 대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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