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동안 터키를 돌아다녔다. 간단하게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놓자.

1. 거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갔다. 그냥 먹고 놀다 올 참으로. 터키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할 일이 참 많았는데 이 말이 어찌나 어렵던지 아직도 내 입에 붙지 않다. 나의 낡은 머리란...

2. 터키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다. 아니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거의 천사다. 한국 사람이라고 몰려들어 같이 사진을 찍는 여학생들:) 영어가 겨우 겨우 통하는 어느 택시 아저씨는, 내가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니까, "블러드 브라더스"란다!

3. 터키 사람들의 순수함을 이야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거리에서 홍합밥을 사먹는데, 자꾸 먹다보니까 10개를 먹었다. 하나에 1리라니까 10리라. 지갑을 꺼내니 5리라 짜리랑 20리라 짜리 지폐가 있었다. 20리라를 내려니 홍합밥 파는 아저씨가 5리라 짜리를 낚아챈다. 내가 노노노를 외쳤지만 괜찮단다~

4. 어느 사원에 가서 천정이랑 벽이랑 멍청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수염이 허연 어르신이 나를 끌고 벽 쪽으로 가신다. 그리고 사십 센티 길이의 돌로 된 피스톤을 가리키신다. 지진이 나면 이 원기둥이 파르르 떨며 소리를 낸다는 것을 손발을 써가며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5. 택시를 잡으려는데 잘 못잡고 있었다. 서 있는 택시들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닌지 고개를 설레 설레. 그러다가 어느 택시 기사분이 나서서 복잡한 교통을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다 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땡큐"를 외치자 0.2초 정도 씽긋 미소를 짓고는 암 것 아닌 듯한 표정으로 돌아가더라. 

6. 어느 아저씨. 오렌지를 까먹고 있다가 다가오셔서 영어로 띄엄띄엄 말씀하신다. 아들이 뉴욕에 사는데 한국 여자를 만났단다. 아들은 무슬림, 한국 여자는 카톨릭. 크리스마스때 어찌 저찌 했다고 하는데 알아 듣기 힘들었다. 어쨌든 먹던 오렌지 반쪽을 주신다. 넙죽 받아 먹었다. -6일 동안이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7. 이스탄불에서 페리를 타고 인근의 프린스 아일랜드에 갔다. 거기서 자전거 일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배. 옆 자리에 터키 사람들이 앉았다. 서로 가볍게 인사. 베이글같은 빵을 사더니 반을 잘라 나를 준다. 갈매기 먹이로 날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갈매기가 몇 없었다. 그래서 대신 내가 먹었다. 그랬더니 베이글같은 빵을 또 주었다. 그래서 내가 또 먹었다. 그랬더니 터키 국기를 주더라. 고맙다고 잘 간직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문이 열려서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같이 터키식 차(차이)를 사먹었다. 주소 주면서 자기 집이 브루사에 있는데 내일 꼭 놀러 오라고. 

8. 다음날 페리타고, 미니버스 타고, 기차 타고, 트램 타고, 택시 타고 해서 그 친구 집에 갔다. 이미 저녁. 그 친구 이름은 세파인데 자고 가란다. 세파, 세파 아내, 세파네 엄마, 장모, 2살 짜리 아들과 같이 밥먹고, 세파 차로 브루사를 총알 여행하고, 어느 산꼭대기 올라가서 터키 차를 마시고 놀았다. 대화는 구글 트랜스레이터로. 산꼭대기에서 차 마실 때는 언어가 없으니 나름 어색한 침묵. -영국 돌아와서도 이 친구랑은 연락을 하고 있다. 런던 오고 싶어하는데 너무 비싸단다. 비싸다.

9. 터키에 와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모던 아트 갤러리. 터키의 현대를 알고 싶었기 때문. 마침 과거와 미래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정학상 터키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던 나라. 예를 들어 1900년대 초에 터키 정부는 화가들을 프랑스에 유학 보냈고 그들은 인상주의 화풍을 가지고 터키로 돌아왔다. 터키 화가들의 인상주의 그림들을 보는 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10. 터키의 과학사 박물관. 터키는 어마어마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문화 유산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 나로서는 Abu Zayd의 "Sustenance for Body and Soul"라는 의미심장한 서명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11. 숙소가 탁심 광장에 있었는데 메이 데이때 경찰들이 광장을 봉쇄해 버렸다. 저녁때 숙소로 돌어가는 길을 경찰들이 막아서 안들여보내주었다. 관광객이니 보내달라 했지만 요지부동. 어떤 터키 아가씨가 관광객이니 보내주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 같았고, 경찰 대장은 아무도 통과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사람들의 야유 소리. 결국 경찰 대장은 나에게 여권을 요구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나서 경찰들의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12. 터키는 엄청나게 복잡한 나라다. 탁심 광장 시위도 한가지 잣대로 꿰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방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이 박수 칠 때 같이 박수를 치고, 메이 데이 다음날 지하철 역 앞에서, 아마 사회주의 당원들이 팔던, 내가 읽지도 못하는 터키어 신문을 1리라에 사는 것 뿐이었다. 찻집에서 계산을 하는데, 테레비에서 경찰들이 시위하는 시민들을 강제 연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지켜 보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람들을 돌아보며 저것 좀 보라고 손짓을 했는데, 찻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

14. 내가 터키에 가서 비로서 알게 된 것은 터키가 이슬람 국가라는 것이었다. 정교 분리라고는 하지만 이슬람 복식을 한 여성들이 엄청 많았다. 이스탄불 교외로 가니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런 복식이었다. 터키에 있는 동안 이슬람 사원들을 많이 방문했고, 기도도 많이 드렸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네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절을 한다. 높은 돔 천정 아래에서 숙연히 앉아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 상당 부분은 나의 늙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리라.

15. 터키에서 터키 커피와 포트, 그리고 터키 차 컵, 컵받침, 차숫가락을 사왔다. 터키식 커피는 커피 가루를 포트에 넣고 끓여서 만든다.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처럼 깔끔하고 쫀든쫀득한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탕약같은 맛이 난다. 나는 터키식 커피에 스스로를 길들이려 하고 있다. 터키식 차는 차이라고 부른다. 홍차잎을 중탕으로 끓여낸다. 터키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 없이 이 차이를 마신다. 술은 잘 안마신다. (나는 터키의 국부라는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셨다는 라끄라는 술을 숙소에서 혼자 마셔보았다. 무척 비싼 40도 짜리 독한 술이다. 그런데 맛있다.) 터키에서 사온 작고 투명한 컵에 차이를 만들어 마시면서 나는 "난 투르크화되었어"라고 중얼거리고는 한다.

16. 터키를 떠나면서 세파에게 1, 2년 후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러나 한 5년 정도 후에나 다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터키에 가보고 싶다. 이스탄불에는 거지도 많고, 교통도 최악으로 혼잡하고 곳곳에 삐끼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터키를 떠나면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터키가 그 순수함을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다 문득, 예전, 아주 예전에 어느 서양 사람이 한국에 똑같은 말을 하던 것을 테레비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은 한국인의 정, 순수함을 사랑하였던 것이겠지. 내가 지금 터키 사람들의 정에 반해서, 그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5년 후에 터키는 많이 세련되고 좀 더 깍쟁이같은 나라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작은 상점들은 죄 없어지고 큰 쇼핑몰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좀 더 힘을 발휘하여 사회의 진화를 늦출 지도 모르겠다. 난 단지 이방인일 뿐이고, 이방인의 바램이라는 것은 단 한 줌의 무게도 가지지 않는다. 터키 사람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선택을 긍정하면서 터키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7. 터키에 있으면서 나는 유럽이 지구상의 한 지역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터키에 발을 들여놓아 본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말로 하려면 한없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렇게만 말하자. 터키를 방문해 보세요! -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 포스팅~

(혹시 댓글이 있어도 대댓글을 달지는 않겠습니다. 침묵 중(?)인지라...) 

추) 어제 한국 친구들이 놀러왔다. 터키 차를 내어 놓고 터키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물론 터키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친구들 말에 따르면 터키는 조심해야 할 나라란다. 몇 년 전에 한국 대학생들이 여럿 실종되기도 했다고 하고. 나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가 한국인에게 특히 친절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범죄로 이어진다면,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타겟 아닌가! 내가 포스팅을 너무 무책임하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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