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간으로 토요일 저녁에 서울 시청앞에서 총파업 집회가 있을 거라고 해서 여기 영국에서 잠에서 깨자마자 다음 사이트를 찾아들어갔다. 그러나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기사도, 집회 전경을 찍은 사진도 쉽게 찾기 힘들었다.

코레일 자회사의 민영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이제 없는 것 같다. 민노총이 총파업을 결의하고 한국노총이 동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한국의 총리는 공기업들에 부채를 줄이기 위해 핵심 우량 자산을 팔아라 라고 말했다. 매각 과정에서 헐값 매각 논란이 나와도, 노조의 파업으로 곤란을 겪게 되어도 정부가 다 면책해 주고, 막아주겠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최장기 철도 파업이고, 민노총의 총파업이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기업들의 민영화를 강행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박근혜가 지지율 관리, 지방선거, 총선, 차기 대선을 통한 정권 연장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직 견고하긴 하지만 박근혜의 지지율은 하향 추세다. 앞으로 숱하게 불거질 민영화 논란, 정부 기관들의 불법 대선 개입으로 인한 정통성 시비 등등으로 박근혜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강공책은 무모해 보인다. 언론이 아무리 박근혜를 보호해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강공책으로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 박근혜는 분명 아니다. 새누리당도 아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정치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정부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는 새누리당이 여당으로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가장 커다란 수혜 집단은 온갖 이해 관계로 얽혀 있는 정부의 관료들일 것이다. 이들은 박근혜가 민영화 드라이브로 지지율이 떨어지든 말든, 혹 정권 연장에 실패하든 말든 별로 게의치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이런 정책들을 밀어 붙일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를 거의 바보라고 본다. 박근혜는 후보자 토론회 때 자신의 아주 상식적인 공약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기본적인 법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인 법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무조건 바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다선 의원 출신의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부패한 정부 관료들이 멍청하고 권위주의적인 대통령 뒤에서 정부 정책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이룩된 재산들을 다 팔아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미 FTA때문에 일단 민영화가 시행되면 FTA를 폐기하지 않는 한 이를 되돌릴 방법도 없다. 완벽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라는 화두로 돌아온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자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산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소통시킬 것인가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철도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철도 관련 정보를 혼자만 갖고 있으려고 한다. 그것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는 정보를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바탕에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토론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그 정보를 이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정보가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되는 상황은 정보를 독점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결국 이 세력과의 싸움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가능한 투명하게 퍼뜨리려는 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한사코 파괴하고자 한다. 국가 기관이 대거 동원되어 시민들의 이러 저러한 의견에 빨갱이, 종북, 전라도, 좌파... 등등의 표딱지를 붙이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심지어는 대학가에 붙은 대자보 한 장도, 함께 토론해 볼 "의견"이 아니라 찢어버려야할 "선동"이 되어 버린다. (선동이란 말은 대상을 상정한다. 즉, 대자보를 읽는 사람이 선동의 대상이 된다. 선동될 수 있으므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을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권위주의다. 권위주의 정권은 시민들이 믿어야 할 것, 옳다고 판단해야 할 것의 기준을 자신들이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네들의 말이야말로 선동이다.)

한국에서 권위주의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이 아직 이념성이 약하고 위계가 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이가 들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진세율을 완화하려는 정당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합리화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념성이 매우 희석되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내가 박근혜를 선택했을 때 나의 선택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이념이란 사실상 존재치 않는다. 정당화의 논리가 부재할 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화 자체를 단절하는 것 뿐이다. 한국에서 대화 단절의 논리는 대단히 풍부하게 개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늙은이에게 항변하는 젊은이는 아직 뭔가를 모르는 어린애거나 폐륜아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항변하는 사람은 빨갱이거나 선동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소통은 억제된다. 즉, 민주주의는 억제된다.

전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통의 억압 현상은 한국에게 극히 불행한 일이다. 한국은 급격하게 늙어가는 나라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변환해야 할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손학규가 말한 "저녁이 있는 삶"은 우리의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이 패러다임은 사회의 압착을 의미한다. 이 패러다임은 중산층을 늘리는 정책들을 의미하고, 그것은 기득권층의 양보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권의 대단한 역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현실은, 희소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일부 세력들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 사대강이 그렇고, 각종 민영화 정책들이 그렇다. 고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매력적인 투자처가 다 말라 버린 상태에서 이들은 영원토록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채가고 있다. 사회는 압착이 아니라 모래시계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포함하여, 이 역사의 역류를 돌이킬 무슨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한다. 지금 정부는 앞뒤 재지 않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기를 써가며 각종 민영화 정책(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의료 민영화를 포함하여)들을 추진하고 있다. 어떤 반대도 통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기 전에 어서 빨리 해치우려 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책들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은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것 뿐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 박근혜를 하야시키는 것은 마음이야 즐겁겠지만 그저 공상일 뿐이이다. 총선에서 야당이 절대 과반수를 점해 박근혜를 탄핵시키는 것도 흐뭇한 공상일 뿐이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겠지만 박근혜 퇴진이 박근혜 반대 운동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답은, 매우 상식적이게도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를 들면, 첫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을 총파업 시국에 너무 무리하게 관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좀 더 장기적으로 야당들의 지지도를 높이는 구도 속에서 야당들이 움직여야 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은 여당에게 어부지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경쟁과 연대를 해나가야 하리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어떻게가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셋째, 야당들은 총선과 대선이 공정선거가 될 수 있도록 재발방지대책을 확실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안철수가 이 문제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고무적인 부분도 많다. 첫째는, 이제 국민 모두가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대선의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과정을 통해 박근혜를 부정선거당선자라는 프레임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박근혜는 임기 내내 적자재정을 해야 하고, 그러므로 만성적인 세수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것이다. 박근혜는 기득권층의 허수아비 정권이므로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서민 증세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체감 경기 침체 속에서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정권은 없을 것이다. 셋째는, 박근혜 정권은 깜짝쇼 카드를 이미 다 썼다는 것이다. 해외 순방 퍼레이드도 이제 끝났고 노무현 NLL 카드도 다 끝났고, 등등. 아직 4년이나 임기가 남은 박근혜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강권 통치뿐일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공안 강권 통치를 4년이나 지속하는 정권이 21세기에 정권재창출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내 얘기를 하자면, 얼마 전에 한인 신문에 난 한국의 상황을 읽고 나는 굉장히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만약 박근혜 다음에 한국 국민들이 또다시 새누리당에 정권을 주면 나는 차라리 영국에서 시민권이나 따고 말아야 겠다고, 맘에 없는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나는 영국에 앞으로도 오래 체류할 예정인데 시민권을 신청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한국의 날씨보다는 차라리 영국의 날씨를 좋아하고 한국의 음식보다는 차라리 영국의 음식(!)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 문화에 대한 나의 자부심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영국의 조그마한 마을들에 가보면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그런 가게들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일본의 민화들이 많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그저 콧웃음을 친다. 한국의 작품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한국처럼 자연스러움을 미의 궁극의 기준으로 삼아 이룩된 문화가 또 있을까? 나는 내가 반가사유상의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가사유상이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인류에 제공하고 있는 문화권이 또 있을까? 나는 내가 한국 문화의 일부로서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간직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신에게 간곡하게 빈다.

어제 몇 가지 희망의 메시지를 얻었다. 유튭에서 김용옥과 노무현의 대담을 봤는데, 영국의 정치 문화가 부럽지 않을 만큼 진솔하고 담백하고 날카로운 대담을 철학자 김용옥과 대통령 노무현이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이런 높은 수준의 정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문화가 다시 등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과연 과도한 것일까? 유튭에서 김대중의 노무현에 대한 추도사를 보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으로 하는 말이었다. 무자비한 억압의 시대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투쟁했던, 이제는 연로한 한 정치인이 속으로 울면서 하는 말을 들으며, 만약 우리가 여기서 희망을 버린다면 참 우스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유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어린 친구들, 아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친구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인 것 같았다. 아버지, 할아버지와의 정치적 갈등을 토로하는 글들을 나는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윗 세대가 한국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우리가 여기서 단념해 버릴 수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국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기성세대에 나도 속해 있다. 나도 반성을 하여야 한다. 이 존경스러운 어린 세대들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다수를 이룰 때 한국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린 세대들이 한국의 희망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서 나는 기뻤다. 

(물 위를 자꾸 들락 거리고 있으므로 이제 잠수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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