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오고나니 로마는 마치 꿈결 속의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날씨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한낮은 덥다. 영국은 바람 불고 춥고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 별안간 햇볕이 나고, 그러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비가 내리는 그런 날씨다. 벌써 로마가 그리워진다.
로마에는 딱 3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음식은 이탈리아식으로만 먹었다. 피자, 파스타, 라자냐, 그리고 피자, 그리고 또 피자...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포도주. 포도. 올리브. 피자 가게는 아주 널려 있었는데 민박집 근처에도 맛있는 피자 가게가 있어서 세 끼니를 다 거기 걸로 먹은 날도 있었다. 화덕에서 구워낸 것처럼 빵맛이 좋았다. 아침마다 먹었던 커피. 처음엔 에스프레소를 먹다가 오히려 아메리카노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생콩을 간 듯한 약간 비릿한 맛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돌아오는 날 민박집 주인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로마에서 피자만 진탕 먹었다, 뭔가 추천해 줄 만한 이탈리아 음식 없냐,고 했더니 피자는 나폴리가 원산이고 로마는 파스타란다. 그러면서 고기를 넣은 파스타, 버섯을 넣은 파스타 등등 다양한 파스타를 맛볼 수 있을 거라나... 속으로 웃었다. 그래봤자 다 파스타 아닌가! (로마 있는 동안 딱 하루 비가 온 적이 있었다. 이 민박집 주인이 날씨가 안좋아서 안됐단다. 오우, 천만에~)
런던에서는 정장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로마에서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를 탄다. 로마에는 언덕이 많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많고 도로 주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많다. 차선 구분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어느 광장 앞 도로는 교통량이 엄청난 데도 신호등이 없다. 횡단보도 표시는 되어 있는데 신호등은 없고, 차량이 일이미터 간격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 곳을 사람들은 어떻게 건널까? 그냥 몸빵으로 들이민다. 그러면 차가 선다. 나도 몸빵하며 이런 도로들을 무수히 건너 다녔다. 재미있더라.
로마에서는 영어가 특권적 위치의 언어가 아닌 것 같았다. 영어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등의 언어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콘센트 사러 가게에 갔었는데 점원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기도 했고, 물을 사러 갔는데 "워터"라고 하자 점원이 "아쿠아?" 라고 되묻기도 했었다. 그래도 라디오 음악 방송에선 거의 팝송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를 스쳐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한번은 트럭 하나가 빵 하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기에 쳐다봤더니 길가 어떤 사람한테 인사를 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또 한번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시비가 붙었는데 오토바이 뒷 좌석에 탄 젊은 여자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규칙을 꼬박꼬박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덜한 것 같고, 솔직한 것 같다는 유추를 해보았다. 영국 사람들은 남과 깊게 엮이는 상황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런 데 별 의식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사람들이 아마 정이 많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나 터키 사람들도 정이 많을런지 모르겠다. 한 친구가 이스탄불로 배낭 여행을 갔는데, 거기 사람들이 초면인 이 친구를 결혼식에 끌고 가서 잘 먹여 주었다고 하더라. (물론 이 친구는 여자다.) 이런 얘기를 다른 친구 하나와 하다가,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다들 민주주의에는 문제가 있는 나라구나... 하며 웃었다. 네덜란드같이 인간관계가 칼날같은 나라는 민주주의 제도의 우등생이다. 반면, 인간 관계의 경계선이 복잡하고 애매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회에서라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역시 제대로 된 토대를 확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 경우에 속할 것이다...
(로마가 그리워져서 톰 행크스 주연의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를 보았다. 친구네가 준 것인데, 원작 소설의 초반부를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도 엉망일 거라고 생각하고 아예 볼 생각도 안하고 있던 차였다. 뽀뽈로 광장과 카라바조의 베드로 작품이 나오는 장면을 보니 반갑더라. 포로 로마노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는 그래도 볼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