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2일부터 25일까지 로마 여행을 다녀왔다. 같은 유럽이라지만 영국과 이탈리아는 많이 달랐다. 날씨, 사람, 건물, 음식 등등... 짧은 여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딱 하나만 기록해 두자.
로마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신문을 읽었다. 어떤 화가가 카라바조의 '나자렛의 되살아남'이라는 작품을 보고 자신이 매너리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얻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나는 이번 로마 여행을 위해서 이탈리아의 화가들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기사가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로마의 어떤 성당을 찾아갔다. 카라바조가 그린, 마태를 주제로 한 작품 세 개가 벽면에 붙어 있는 성당이었다. 그 작품들 앞에 서자마자 나는 비행기에서 읽은 신문 기사의 그 화가가 말한 매너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성당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스타일이나 주제를 취급하는 방법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아니, 카라바조의 것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은 비슷한 스타일과 비슷한 주제 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마태 연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태와 천사라는 작품이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원래 작품은 성당측이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카라바조가 같은 주제를 다시 그린 작품이 지금 성당에 붙어 있는 그림이고 처음에 그렸던 것은 이차대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태 연작 세 작품 중 다시 그린 마태와 천사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긴 해도 내 눈에는 힘이 가장 떨어져 보였다. 원래 작품이 그대로 걸렸었더라면 세 연작은 더욱 빛났을 텐데... 성당 안 기념품 코너에서 갈등하다 나는 결국 마태와 천사 대신 마태의 부름이라는 작품의 프린트를 5 유로에 샀다. (지금 내 방안에 있다. 놀라운 작품이다.)
뽀뽈로 광장에 있는 성당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이 한 점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나는 그걸 보러 갔다. 성당 안에는 긴 나무 의자들이 늘어 서 있었고 맨 앞 줄에는 할머니 네 분이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역시나 성당의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며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이라는 공간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마련된 것일까?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은 신자들에게 성스러움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카라바조의 그림들은 그러한 목적에 잘 부합하는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바조는 신, 신적인 경험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지를 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버리고 싶어졌다. 5 유로나 들였는데...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뽀뽈로 광장에서 뻗어나가는 길 한 쪽에 괴테가 묵었던 집이 있었다. 거길 찾아 갔는데 시간이 늦어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지하철을 타러 다시 뽀뽈로 광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멋진 아리아가 들려오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 소프라노가 돈통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석조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길이라 소리의 울림 효과가 아주 좋았다. 아름다웠다. 노래가 끝나자 저절로 박수가 쳐졌고 그래서 1 유로를 돈통에 넣어 주어야 했다.
노래에 감동된 채 뽀뽈로 광장을 통과하다 보니 카라바조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성당이 다시 눈 앞에 나타났다. 아마 카라바조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나는 저 성당에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저 성당 안에서 빛과 어둠, 침묵과 할머니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에 둘러싸여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었다. 즉, 나를 그러한 경험 안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카라바조였다. 종교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영속케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일 것이다. 나는 카라바조의 노력이 성소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달았다. 카라바조를 버리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여행 마지막 날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가서 카라바조의 점쟁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역시나 그의 작품은 거기에 전시되어 있던 다른 모든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강력한 존재감은 정말 경이적이다. 로마에서 이런 화가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