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처음 와서 어학원 다닐 때 같은 반에 터키 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한국 전쟁 때 터키가 한국 도와줬던 거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안다고 하더라. 난 그래서 한국 국민들이 터키를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올핸가 작년엔가 영국 어느 지방 마을의 자선 행사에 갔었을 때 노인 부부가 나더러 일본 사람이냐며 말을 걸어 왔다. 사우쓰 코리언이다, 지금 한국에서 전쟁 날지 모른다고 뉴스에서 그러던데 어떠냐, 별로 걱정 안한다, 다 말만 그런 거다. 그러자 갑자기 노인의 표정이 안좋아졌다. 젊은 사람의 세상 인식이 너무 안이하다고 느꼈나 보다. 이 할아버지도 한국 전쟁 때 영국군이 한국을 도와 준 걸,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노인 부부와 너무 오래 말을 했어서 난 어쩔 수 없이 이 부부의 그림을 한 점 사야 했다. (부부 화가였다.)
한국 친구 하나는 영국 사람에게 맨투맨 회화 지도를 받았었다. 그 영국 선생은 한국 학생들을 많이 가르쳐 보았다고 했다. 그 영국 선생이 말하기를, 한국 학생들에게 놀란 것 중 하나는 한국 학생들이 전쟁 때 한국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하더라.
올해가 아마 정전 60 주년인가 일거다. 이곳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에 글래스터 대대 이야기가 실렸었다. 한국 전쟁 때 영국 주력 부대 중 하나인 글래스터 대대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내다 대대 자체가 박살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고 일부는 전사하고 나머지는 중공군에 억류되어 전쟁 끝날 때까지 한 2년 포로로 있었다는 것이다. 대대는 박살이 났지만 중공군의 총공세를 몇칠 동안 막아내어 연합군이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한다. 이 역전의 용사들이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파주시와 자매 결연도 맺고 파주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전해주고 했다는 기사였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봤던 뉴스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해외 불우 아동을 돕는 일을 하는 분과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앵커는 이렇게 말했었다. "한국에도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 데 말이죠..." 한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게 일의 순서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이미 몇 년 지난 이야기니 텔레비젼에 나와서 대놓고 이 앵커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제 없겠지...
한국은 컸다. 혼자 잘해서 이만큼 컸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졸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큰만큼 책임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삼성이 이번에 스마트워치를 발표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에 10 페이지 전면 광고를 때려 부었단다. 어떤 면에서는 삼성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삼성스럽지 않다.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인지도를 확 올리려는 것은 과연 삼성스러운 전략이다(첼시를 통한 마케팅은 대단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시장에 선도적으로 진입하려는 것은 삼성스러운 행보가 아니다. 삼성은 패스트 팔로워 능력으로 세계 최고다. 삼성은 이런 전략으로 소니와 노키아가 저문 가운데서도 여전히 시장의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삼성은 세계 최일류 기업 중 하나로 커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책임이, 삼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여되고 만다. 이번 스마트워치 출시를 통해 삼성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패스트 팔로워일 수 없고 시장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자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삼성은 2류로서 중국 기업과 경쟁하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작권 환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이 원하는 건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받는 것이다. 예전에 한국이 주한미군을 한강 이북에 묶어두려고 한 것이 이런 심리였다. 한국은 주한미군의 인계철선화를 통해 두 가지 직접적인 이득을 봤다. 하나는 북한의 남침의지를 완전히 꺽어버린 것이다. (남침을 하려면 전방의 주한미군을 공격해야 하고 주한미군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군사개입을 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미국의 엄호 아래 한국은 국방에 대한 부담을 덜고 경제 부문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뒤져 있을 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한국이 안정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할 때까지 주한미군을 인계철선으로 제공하면서 한국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면 이제는? 한국이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세계 10대 강국이 된 지금은?
자신을 현실주의자라 자처하면서 아직도 옛날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최대한 보장받고 세계 최첨단 미군의 장비에 기대면 국방비를 절감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어 한국으로서는 이득이 아니냐고, 그러니 그깟 자존심 좀 죽이고 반미 구호 외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반미도 친미도 아니고, 그냥 한국이 너무 커버렸다는 데 있다.
미국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미 군사적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신의 국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음에도 주한미군을 인계철선으로 삼기 위해서, 즉 국방의 일차적인 책임을 주한미군의 피에 지게 하려고 주한미군의 한강이남 이동에 반대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미국이 재정 문제와 군운용 전략의 변화로 주한미군을 변경 감축하려 하자 자신의 재정을 사용해서 자구책을 세우는 데는 게을리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작권 반환은 이미 한번 연기되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동안 아무 자구 노력도 안하다가 때가 되자 또다시 연기해 달라고 간청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너무 이기적이고 속물적이지 않은가? 한국은, 자리 잡을 때까지 임대료를 면제해 주었더니 돈을 잘 벌게 된 후에도 임대료를 안내려고 하는 어느 벤처 기업과 똑같다.
어제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에서 요즘 일어나는 일들의 핵심은 결국 이런 것 같다: 복지에든 안보에든 돈 뜯기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한국은 이미 너무 커버렸다는 것이다. 전작권을 안받고 안보를 미국에 일차적으로 의존하고 싶으면 그만한 비용을 미국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MD 가입이든 아니든. 요점은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어린이 무료 입장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각이 빠를 수록 모양새를 덜 구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