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소나무, 벚꽃, 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 비온 뒤라 그런지 꽤 높이 떠있는 하얀 구름. 기차 역 가는 길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무척 낯익다. 똑같은 잠바에, 똑같은 신발에, 똑같은 가방. 나 역시도 몇 달 전 영국에서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아, 머리를 볶았구나. 마치 발가락은 닮았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몇 달 전과 마찬가지로 영어 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이것이 반복이 아니라 나선 계단의 새로운 마디이기를... 때로는 친숙한 풍경이 사람을 낙담케 하는 것 같다.

워털루역. 나는, 개찰구를 나서는 순간 하얀 채광 속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경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워털루역의 첫 인상을 기억한다. 이 기억으로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그리려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앞에서마냥 워털루역 안에서 내 기분이 한 껏 고양됨을 느끼곤 했다. 오늘 워털루역은 이층 발코니 공사를 한다고 자리를 차지해서 역 구내가 좁아졌고, 사람들도 붐빌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암튼 반가왔다. 내 기분도 습관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영어 레벨 테스트. 런던의 인상적인 장소를 묻기에 워털루역이라고 말했다. 거기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강사는 내가 말을 너무 짧게 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그 이상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주로는 나의 영어가 짧으므로. 그리고 나는 듣는 사람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짧게 끊는 버릇을 들였었으니까. 나는 가능하면 길고 호들갑스럽게 말하기로 했다. 나는 런던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러 저러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이러 저러한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고, 고전적인 면모와 역동적인 면모를 함께 가지고 있어서 아주 매력적인 도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사가 "the best city you've ever been to"라고 찔러 들어왔고, 나는 잠시 망설인 끝에, 그렇다고, 서울보다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해 버렸다. 내가 너무 나갔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런던이 서울보다 매력적인 도시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은 사막과 같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대로 가꾸어 내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어마어마한 세대에 걸쳐 투여되어야 하리라. 서울은 새로운 명창이 필요하고, 새로운 고수가 필요하고,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 어쨌든 나는 강사의 입을 찢어놓는데 성공했다. 이쪽 사람들은 자기네 칭찬을 하면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한다. 

학생 중에 이탈리아 여자분이 하나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6월 달에 네덜란드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거기서 4년 살다 왔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런던보다 문화적으로 더 다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안전하고, 사람들이 더 친절하고, 음식이 더 다양하고, 교통이 더 잘 되어 있고 등등. 런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입 모양이 ~나 ^로, 네덜란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로 변한다. 나의 좁은 경험으로 볼 때, 사람들은 영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영국의 날씨, 좁은 도로, 저돌적인 택시들, 비싼 물가, 혼잡함, 사귀기 힘든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사람들...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도 스페인에서 온 학생은 이렇게 불평한다. "날씨가 너무 자주 변해~"

나에게 네덜란드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의 나라이다. 오늘 런던 가는 기차 간에서 읽은 책도 스피노자에 관한 것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피노자의 이상이 가장 충실하게 구현된 나라는 어디일까? 만일 그런 곳 중 하나가 네덜란드라면 스피노자로서도 무척 흐뭇한 일일 것이다. 아다시피 스피노자는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포루투갈 출신이고, 유대인이지만 유대 사회에서 파문을 당했고, 친구와 후원자들은 신교를 믿었지만 그 자신은 신교도가 아니었던, 철저하게 이방인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이런 이방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삶을 도모하는 사회로 가장 모범적인 곳은 어디일까? 네덜란드가 그 중 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아, 그 이탈리아 여자 분이 네덜란드를 가리키며 사용한 단어가 갑자기 생각난다. 코스모폴리탄. 틀림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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