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잔뜩 찌푸린 채 낮게 드리워져 있다. 입을 열 때마다 옅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역 구내 승객 대기실 안에 앉아 있던 형광색 외투를 입은 백발의 아저씨와 창문 유리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플랫폼과 나란히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뭔가를 먹으며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자는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다. 나는 손에 든 우산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장난을 했다. "서울도 여름이 끝났다고 하던데..." "엊그제까지는 정말 날이 좋았는데 갑자기 추워졌네. 커피 먹을래?" S는 서울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 가게를 고개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워털루 가서 먹자. 여기 꺼는 맛이 없어." 라고 말했다. 나는 커피 가게를 쳐다 보았다. 커피 가게 안에는 둥근 턱수염을 한 덩치 큰 사내가 순진한 표정을 한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우리는 벤치 앞에 서서 때 이르게 다가온 추위에 투덜대며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 창 밖으로 열지어 나타나는 건물들은 모두 낡고 초라해 보였다. 하늘도 건물도 잿빛이고 녹이 슬었고 스프레이로 그린 우울한 낙서를 갖고 있었다. "책에서 본 이미지 그대로군." "내가 말했잖아. 겨울에는 우울하다고. 그래도 날 좋은 날은 진짜 좋아. 엊그제 처칠네 생가 마을 갔을 때는 날이 얼마나 좋았다고." 우리가 앉은 창쪽 의자에는 젊은 남자 둘이 앉아 있었고, 대각선 쪽에는 중년의 남자가 살구색 신문을 읽고 있었다. 승객은 그들 뿐이었고 차 안은 조용했다. 검은 머리를 한 우리 둘만이 두런 두런 말을 이어갔다. 철로 주변의 낡고 낮고 창고처럼 생긴 건물들 너머로 멀리 유리로 전면을 덮은, 기하학적으로 꽤나 멋을 낸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 눈에 들어온 것은 둘의 부조화였다. 어쨌든 거기쯤이 런던이리라.

워털루 역의 천정은 높았고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다양한 피부색을 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곧장 테이크 아웃 커피점으로 향했다. 그 맞은 편 가게들에서는 샌드위치 등 먹을 것을 팔았다. 내가 그것들에 눈길을 주는 것을 본 S가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도 있어. 그런데 맛 없어."라고 했다. 카푸치노를 사서 손에 들고 먹으며 지하철 개찰구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커피는 맛 있었고 덩치 큰 아줌마 곁에서 재잘대는 검은색의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껑충하게 키가 큰 백인 아저씨, 콧날이 조각처럼 서늘한 금발의 젊은 여자, 단발 머리를 한 구부정한 할머니, 머리를 빡빡 깍은 젊은 남자, 힙합 디제이처럼 치장하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걷는 흑인 아저씨, 이 모든 사람들이 워털루 역의 하얀 내부 벽면 안으로 가득 부서지는 환한 빛들 아래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S에게 속삭였다. "예쁜 여자들이 많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깊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에스컬레이터 발판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테두리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오른편에 붙어 서 있고 급한 사람은 왼쪽편으로 걷는다. 연결 통로는 작고 좁다. 플랫폼 너비도 좁다. 사람들은 쉽게 양보하고 "sorry"와 "excuse me"를 연발한다. 연결 통로를 지나는데 잘 빠진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한다. 거리의 음악가다. 나는 눈 앞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들을 붙잡으며 서울의 것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런던의 것들은 작고 아담하고 실용적이다. 어쩌면 런던의 연륜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은 젊은 도시다. 크고 화려하다. 나는 사람들로 꽉 찬 100년도 더 된 지하철 안에서 뜻밖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워털루 역에서부터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나는 이 편안함의 기원을 알고 싶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J를 만났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정말 오랜 만이었다. 재회의 장소로 이국의 내셔널 갤러리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또 만난단다. 일단의 사람들이 내셔널 갤러리의 난간에 기대어 드라팔가 광장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도 따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기둥 모양의 기다란 탑이 있을 뿐이었다. "쳇, 다들 관광객들인가 보군." 내셔널 갤러리 바로 앞에서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떠들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날이 좋을 때는 광장이 사람들로 바글 바글하는 데 오늘은 사람이 없는 편이에요." J가 드라팔가 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내셔널 갤러리를 빠져 나왔다. 저녁에 세익스피어 글로브에서 연극을 보기로 했으므로 미리 요기를 해두어야 한다. 인터벌이 있다니 꽤나 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스탠딩으로 봐야 하니까.

차이나 타운에서 중국 요리를 먹었다. S와 J는 맛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저 그랬다. 라면 면발처럼 가는 면을 기름에 볶아 국물에 말아 내거나 돼지고기, 버섯, 양파 등과 버무려 낸 요리들이어서 쓸데없이 느끼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템즈 강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었다. 비가 오다 가다 했다. 꽤 굵은 비가 내리는 데도 우산도 안든 사람들의 걸음에 종종거림이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녀." S가 말했다. 길 바닥은 돌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내내 굴곡없이 평평했다. 걷기 좋은 길이었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작은 쌕을 등에 매고 빗속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도 간간이 보였다. "힘들지 않으세요?" J가 내게 물었다. 시차때문에 피곤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나는 깊은 생각에서 막 깬 사람처럼, 아니면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갑자기 멈추어져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자유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곧이 곧대로 말해도 될런지 계산이 필요했다. "나는 자유로움을 느껴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갈 곳까지 가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가 살짝 약해지자 우리는 우산을 접고 걸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벽을 따라 빗속에서 십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극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심해졌다. 대부분 우산을 썼고 몇몇은 비닐로 된 비옷을 입었다. "비가 장마비처럼 오네. 보통 영국 비는 오다 말거든요." J가 좀처럼 가늘어지지 않는 비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줄은 계속 길어졌다. 7시쯤이 되어 극장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극장 마당 안에서 또 줄을 서야 했다. 다행히 비는 가늘어지고 있었다. 내 뒤쪽에 서 있던 아줌마 두 분이 아름다운 영어로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줄 서서 기다리다 친해졌나 보다. 사과를 먹는 사람도 있고, 빵을 먹는 사람도 있다. "나도 길거리 걸으면서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데." 나는 식습관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S가 반박을 했다. "난 저런 거 싫드라." S는 새침한 척을 한다. "오늘 제대로 낭만적인데!" 나는 마냥 즐거웠다. "사랑하기 좋은 때죠." J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받았다.

드디어 무대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우리는 무대 바로 앞 자리를 차지했다. 나무로 된 무대의 앞 부분이 비에 젖어 있었다. 다행히도 비는 가늘어져 갔고 사람들은 늘어갔다. 무대 앞 마당과 1층, 2층 좌석까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자 비는 그쳤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곧 공연이 시작될 거 같았다. 무대 중앙 높은 단 위에 자리 잡은 현악기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주위가 조용해 졌다. 배우 몇 명이 나와 무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밝게 웃으며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주 예쁜 여배우 하나가 내 옆쪽에 있는 사람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부러웠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앤 불린"이다. 극은 빠르고 경쾌하고 흠잡을 데 없이 진행되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S는 곧잘 키득대며 웃었고 J는 연방 사진을 찍었다. 관객들은 때때로 폭소를 터뜨리며 연극에 빠져들었다. 앤 불린은 영국을 세계사의 새로운 강자로 곧추 세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다. 앤 블린은 왕의 어머니가 될 야망에 이끌려 짧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앤 불린은 대단한 캐릭터다. 그의 개인사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것은 사랑과 이별과 갈등과 음모, 상승과 추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한 국면과, 그리고 종교적으로 매우 논쟁적이며 독특한 어떤 사건의 계기를 이루고 있다. 야심있는 작가라면 앤 불린을 소재로 어떠한 사상이라도 자유롭게 표현해 낼 수 있으리라. 이렇듯 로맨틱하고 이렇듯 논쟁적인 삶을 창조하여 영국의 후손에게 무한한 사상의 원천이 되어 준 앤 불린에게 평화가 있으라! 영국의 후손들은 그를 팔아 세상을 즐겁게 하고 세상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아낌없이 돈을 취하리라! (뭐 이 공연의 스탠딩 가격은 5 파운드, 즉 한국 돈으로 1만원도 안되었다)

추위에 덜덜 떨다 인터벌 시간이 되어 J와 화장실에 갔다. 그러나 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일보는 건 포기해야 했다. 음료와 먹거리를 팔고 있던 마당은 사람들로 장터로 변해 있었다. 젊은층만큼이나 노년층도 많았다. J와 S는 커피를, 나는 백포도주를 샀다. 백포도주는 나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연극이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기립 박수를 했다. 배우들은 두 번 불려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흥겨움과 만족감으로 환한 얼굴을 한 채로 관객들은 흩어져 갔다. 우리는 런던 브릿지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역까지 가는 길은 운치가 있었고 걷기에 좋았다. 추웠지만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오늘 영국이라는 나라는 내게 자신의 아주 작은 부분을 보여 주었다. 나에게 영국은 작고 아담하고 실용적인 나라였다. 지하철도 작고, 연결 통로도 좁고, 도로도 좁다. 영국이 얼리 어댑터였기 때문에 얻게 된 특성이리라. 예를 들어 런던 지하철은 19세기부터 땅 속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최첨단의 위용을 갖는 것이었겠지만 요즘 건설되는 지하철과 비교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과 평행하게 움직인다. 런던 지하철이 그토록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면 지하철과 관련된 문화 역시 그럴 것이다. 세계 최초로 지하철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사회였을 것이다. 한 사회의 힘은 그 구성원들을 단순 생존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하느냐와 정확히 비례한다. 그리고 그 잉여 부분은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욕구와, 그러므로 그 힘과 정확히 비례한다. 그것이 오늘 내가 본 영국이었다. 내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지하철을 타고 셰익스피어 글로브에 가서 200여명의 영국인과 외국인들에 섞여 영국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을 창조한 한 영국 여자의 이야기에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템즈 강변의 잘 포장된 길에서 느낀 자유로움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비가 오는 데도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발걸음을 늦추며 걷던 기억이 났다. 그 속에서 어찌 여유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그것이 영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역사이며 실력이며 문화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영국이라는 사회의 힘이라는 것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명상해 보았다. 그러나 맞은 편쪽에 앉은 남자가 햄버거를 먹고 있어서 명상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햄버거만큼이나 사소하고 다양한 주제들이 계속 침범해 오고 있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관광객이 아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상으로서가 아니라 인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고집. 후~ 나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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