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보려고 네플릭스를 한 달 결제했다. 초반 에피소드 세 편 정도를 보고는 아내에게 말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나? 너무 엉망인데... 6편이 감동적이라는 얘기도 있으니 좀 나아지면 알려줘.


나아졌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궁금함을 참다 못해 마지막 두 세 에피소드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엉망이었다. 최종적으로, 아내는 졸작이라 말했고 나는 방송 사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나의 가장 커다란 문제 제기는 이렇다. 이 작품은 작가 노트 속의 기록들이 충분한 육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본으로 납품된 것 같다는 것. 에피소드의 대부분의 시간이 지지부진, 중언부언, 별 영양가없는 대사들과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즉, 각 에피소드의 상당한 시간이 그저 낭비되고 있다는 것.


취향상 나는 박해영 스타일의 작가들에게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가 수작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들에 내가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더라도 이 작품들이 이뤄낸 성과들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닌 작품,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


이 작품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없다. 한 사람이 길고 길게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듣는다. 역할을 바꾸어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이 작품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관계도 없다. 언제나 황동만 옆에서 사람 좋은 미소만 짓는 그 사람은 황동만의 친구인가? 변은아와 황동만은 연인 관계인가? 그들은 키스하고 섹스를 나누는 그런 관계인가? 작가는 그런 진정한 관계를 그리는데 많이 서툰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서툼이 이 작가의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만일 황동만과 변은아가 키스하고 섹스하는 연인 관계, 아마도 진정한 쏘울 메이트 관계로 그려졌다면 사람들이 이 작품에 그토록 감정이입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황동만은 탁월한 독설가다. 드디어 그의 첫 작품이 나온다. 어떤 작품일까? 황동만의 독설의 희생자들은 이 작품에 어떤 독설을 쏟아낼까? 잔뜩 기대하고 마지막 장면들을 본다. 그리고 작가가 급하게 메가폰을 들고 "평가 중지!"를 외치는 꼴을 보게 된다. 극중 인물들은 황동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감격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고, 황동만 독설의 가장 큰 희생자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황동만은 신인감독상을 탄다. 평가하려 들지 말고 그저 보고 듣고, 그리고 추앙하라!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진정한 관계도, 진정한 대화도, 진정한 열림도 없이, 저마다 자신들의 고뇌, 상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므로 단지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것을 극화하고 이상화한 작품에 제대로 된 비평 한 줄 발견하기 힘든 상황에 답답함을 느낀다.


철학도로서 말하건대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라는 제목은 폭력적이다. 나는 나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지 않다. 왜 나를 그 싸움에 끌어들이는가? 나의 존재가, 세계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은 사실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이해,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내가 카푸치노보다는 에스프레소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면 나는 에스프레소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이 무가치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사실성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나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황동만의 형이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삶이 원초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술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다른 방식의 삶보다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원초적 사실성은 인간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유한자라는 데 있다. 가치와 의미도 인간이 유한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나의 삶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술 마시는데 쓸지 시를 쓰는데 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삶의 조건이 원초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이라면 삶의 자원을 술을 마시는데 쓰든 시를 쓰는데 쓰든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다면, '잘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삶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잘 사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선험적 기준은 없다. 그 기준, 그 가치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삶을 산다는 것은 실재와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재란 나의 의도, 기획 등이 실현을 보기 위해 뚫고 지나가야 할 나 아닌 어떤 타자를 뜻한다. 내가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냉장고까지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셔야 한다. 이런 일은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것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실재는 불투명하며 저항값을 갖는다. 산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인데 행동에는 항상 실재라는 저항체가 개입한다. 우리는 실재라는 저항체, 인간 타자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저항체를 무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 욕망은 삶은 무가치하다, 사람은 무의미하다 라는 말로, 추상적으로나마 실현을 본다. 열려 있음은 실재를 개입시킨다. 그러므로 관계를 닫고, 대화를 닫아야 한다. 인간 타자는 나에게 나 자신의 사실성을 직면하게 하고 그것은 종종 고통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타자성도 무화시키자. 그러면 남는 것은 완전한 고립 또는 추앙 밖에 없다. 나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는 이 진절머리나는 자폐성에 답답함을 느낀다.   


철학도로서 한 마디만 더 하자. 철학자는 눈이 없다. 철학자는 개념으로 사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자, 몸으로 사는 자, 온몸으로 현실에 육박해들어가는 자를 일러 예술가라고 한다. 예술가는 개념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관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다. 철학자는 논리에 따라 운동하지만 예술가는 그 논리 자체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것이 철학자의 근원적 결핍성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예술 영역을 기웃거리며 뭔가 쉰 밥 남은 것은 없는가 하며 살핀다. 이런 것이 철학자의 운명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온몸으로 현실을 살아낼 자신이 없으면서도 예술가를 자처하는 무리 중의 일부가 철학자들의 서재를 뒤져본다. 거기에서 좀 있어 보이는 귀절을 자신의 작가 노트에 옮겨 적고는 그것을 그대로 대본이라며 연기자, 연출자에게 건네준다. 이 뻔뻔함이란! 이보다 더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술가여, 한국의 예술가여, 그대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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