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 gpt가 내 컴퓨터에서는 잘 열리지 않는데, 어쨌든 겨우 겨우 등록하고 테스트를 해보았다. 기대한 바가 커서 그런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대학원 과정 시험에 통과할 수준의 에세이를 써준다든지, 조던 피터슨이 무서우리만치 놀랍다고 했던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검색한 주제(주로 철학)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높게 잡아봐야 위키피디아를 읽기 쉽게 재작성해 준 정도인 것 같다. 피상적인, 아마 대학 과제 레포트 정도 수준? (물론 주제에 맞춰 문장을 작성하는 능력 자체는 놀라웠다. 의외인 것은 중언부언이 많더라는 것...)


그래서 조던 피터슨이 이 챗봇에 던졌다는 질문을 가지고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피터슨에 의하면 몇 초 만에 몇 페이지 분량의 뛰어난 결과물을 토해내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테스트해 보니, 단 몇 줄의, 애초의 요구 사항인 성경의 스타일과 중국 고대 문헌의 스타일을 융합한 형태로 이러 저러한 질문에 답하라는 것에 대해, 응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출력될 뿐이었다. 음... 조던 피터슨과 언론이 난리를 떨어서 챗봇 회사가 몸을 사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 인공지능이 scary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humble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미래는 이미 다 와 있다는 것이리라. 인간이 알파고를 더 이상 이기지 못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을 것이다. 요컨대, 알파고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연결,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코플스턴이라는 신부님이 있다. 우리에게는 서양 철학사가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이 유명한 이유는 자신이 다루는 철학자들의 원전을 직접 읽고 그 기반 위에서 철학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만 해도 다시 반복되기 힘든  초인적인 업적이라고 칭송받는다. 그럼 이번에는, 인공지능이 예컨대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서를 쓴다고 해보자. 이 인공지능은 서양 철학 문헌 뿐 아니라, 아라비아 철학 문헌 뿐 아니라, 인간이 생산한 모든 문헌들을 학습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 대우주에 스피노자가 놓여진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스피노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스피노자라는 존재는, 이 우주의 그 영향들을 자신의 필요에 맞춰 절단함으로써 일정하게 굴절되고 제한된 우주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우주, 둘째, 스피노자란 개체, 그 특이성. 이 두 요소 모두 자료의 방대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아예 접근 불능이거나, 아니면 매우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한다. 인류는, 종합적 역사라는 과제에 대해서도 포기하고 손을 놓은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상대적인 의미에서라도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 방대한 자료에서 연결을 볼 수 있다. 그 연결을 보는 것을 우리는, 인간적 규모에서는 창의성, 인간적 규모를 굳이 전제하지 않는다면, 창발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은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 사건 이후, 듣자하니 바둑계는, 거칠게 말하자면 기생적 연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기생적이라 함은, 모두가 절대 기풍인 알파고 기풍울 학습하며, 그 기풍대로 바둑을 두는 데, 이 기풍을 돌파할 어떠한 가능성의 희망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바둑계는 앞서 말한 스피노자 연구자보다는 상황이 나을 수 있다. 바둑은 스포츠임으로 실시간성이 영원히 미래(열려있음)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즉, 지금 바로 이 순간 두는 이 대국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고 유일한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 연구자의 경우, 인공지능이 쓴 12권 짜리 연구서의 빈 곳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붓을 드는 순간, 혹시나 하고 그에 대해 인공지능에 질의를 하는 순간, 그 빈 곳은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다. 스피노자 연구자에게 미래는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다. 스피노자 연구자는 기생적으로라도 연명할 수 없다. 이 연구자는 압사당할 것이다.


그러면 예술은 어떻게 될까? 예술 역시 그 일회성, 유일성으로, 다시 말하면 원칙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압사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이유는 그것의 생산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잔의 작품이 수 천, 수 만 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양적 제한이 해소된다면, 아마 감상이나 비평이라는 행위는 압사를 당할 것이다. 작품들은 처박혀 있을 것이다. 남는 것은 창조의 순간에 있어 개인적 특이성의 감성 뿐이다. 그러나 이 환희의 순간은 무엇으로 측정되는가? 그것은 그것이 예술인 한, 즉 아이의 놀이같은 것이 아닌 한, 자신의 작품의 희소성, 독창성, 등등에 대한 착각이나 확신 등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감상의 압사와 함께, 창조의 순간에서의 숭고함의 감정도 사그러들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제 사무 노동자를 사무실에서 몰아낼, 혹은 사무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으로 예측되는 인공 지능 기계의 등장이 인간 실재의 몇 측면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나의 현재 생각이다. 실제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런지는 물론 두고 보아야 알 일일 것이다. 적어도 그에 대한 미래는 아직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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