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미메시스 - 서구문학에 잠재된 환상성의 재발견
캐스린 흄 지음, 한창엽 옮김 / 푸른나무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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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서구 문학에 내재된 환상 충동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겠다는 취지에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환상적 요소를 내포한 문학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문학 속에 미메시스 충동과 환상 충동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존재해 있다는 가정 하에서 서구문학에서 환상적 요소가 어떻게 개입되고 왜 환상적 요소가 사용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로즈마리 잭슨의 책이 다소 제한된 영역을 중심으로 환상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주제적 차원을 논하고 있다면, 캐서린 흄의 이 책은 전통적으로 문학 분석의 토대로 사용되어 온 기호론적이고 유형론적인 관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분류에 치중하고 있다. 따라서 잭슨의 책은 환상문학의 의미론적인 차원에 관심을 가진 대중 독자의 관심에 적당하다면, 흄의 이 책은 작가-작품-독자라는 관계나 노스롭 프라이의 희극, 비극, 로망스, 아이러니, 4개의 신화체계로부터 환상성을 양식화하고자 하는 전문 독자에게 적당한 책이 아닌가 싶다.

잭슨의 문체가 엄격하고 명석한 비판에 기반한 다소 건조한 문체라면, 흄의 문체는 다소 산만하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부드러운 문체라고 하겠다. 문체의 차이가 독서 과정에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할 때, 흄의 문체는 학문적 엄격성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다소 산만해 보일 것이 분명하다.

또 잭슨이 주로 근대 이후의 환상 작품에 주 관심을 두고 있다면, 흄은 중세 전공자답게 주로 중세 이전의 작품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면 당연히 잭슨의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흄은 잭슨과는 달리 환상문학만이 아니라 문학 전반을 4가지 양식으로 분류하고 그 속에 개입된 환상적 요소와 그 기능을 밝히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성이라는 기본 테마에 대한 밀도 있는 서술은 아니지만 문학을 폭넓게 바라보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두 권의 책 모두 최근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환상성을 재평가하는 데는 좋은 참고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다만 이 두 권 모두 80년대의 성과이므로 이후 새롭게 진전된 논의 성과를 파악하는 것은 새로운 과제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책은 환상성에 대한 개관이나 총론의 성격이 짙고, 수많은 작품들이나 유형을 일별하고 있을 뿐, 세밀한 각론을 전개하거나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데 주안점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점도 염두에 둬야 할 듯하다.

그리고 이들 책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문학, 영화, tv 등 각종 매체 텍스트에서 환상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긴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 우리에게는 왜 환상이 저급한 장르나 기법으로 이해되며, 환상 장르가 우리에게는 빈곤한지 등의 문제를 우리의 근대적 경험 속에서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테마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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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성 - 전복의 문학, 모더니티총서 14
로즈메리 잭슨 지음, 서강여성문학연구회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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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새로운 세기 들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중심으로 판타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기존의 관습적인 서사 방식과 스토리에 실증이 난 사람들이 그동안 저급 문화 또는 유치 문화라고 저평가되어왔던 판타지 작품에 열광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특히 판타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조차 그 맛을 제대로 느껴볼 기회가 적었던 우리에게 있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갇혀 있는 상상력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리얼리즘이나 모방, 사실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해왔던 지난 시대의 역사적 관습이 암묵적인 강제로 작용해왔던 점 역시 판타지 흥성의 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대중문화의 주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제 판타지 작품들은 새롭게 가치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판타지 작품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상황에서 자칫 맹목적으로 판타지에 열광하는 것도 새로운 편향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가진 사상과 세계관이 지극히 중세적이고 봉건적이라는 점, <반지의 제왕>이 가진 세계의 기독교적 엄숙주의와 배타적인 타자관을 보인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못할 때, 우리는 판타지 작품이 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쉽게 젖어들게 된다.

로즈마리 잭슨의 이 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마도 작가와 작품이 관여하는 세계와 독자가 개입하면서 만들어 내는 세계에 대한 의미론적 차원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판타지는 무비판적으로 동화되고 즐겨야 한다는 또 다른 강제가 낡은 맹신일 수 있음을 잭슨은 강조하고 있다. 특히 톨킨과 그의 <반지의 제왕>이 왜 진정한 의미에서 판타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 한번 경청해볼만 하다.

이 책은 판타지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광범위한 관심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저자가 다루는 작품 중 상당수가 우리에게 낯선 작품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비록 서구 중심적인 역사이지만, 판타지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꽤 소상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작품들에 대한 독서욕을 얻어 새로운 독서로 나아가는 길잡이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판타지 목록이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는가를 이해하고, 보다 광범위한 작품에 대한 출판 바람을 가질 수도 있다.

추리문학이나 판타지문학에 대한 새롭고 적극적인 관심은 분명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르들은 우리의 문학사에서는 낯설고 저급한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일종의 은폐를 통해 이루어진 과대평가와 맹신은 인간의 감수성과 가치관을 편협하게 조작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문학에 대해 주눅들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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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한 질문들
스티븐 히스 지음, 김소연 옮김 / 울력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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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은 즐거운 일이지만, 쇼트나 앵글같은 전문용어를 들먹이며 영화를 해부하는 일은 참 재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전문가의 일이지 평범한 관객이 할 일은 아니다. 영화가 볼거리의 일종으로서 기능해온 역사 속에서 이런 문제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비단 영화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출판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영화 읽기 식의 책은 좀 팔려도 히스의 이런 책들은 영화학도 외에는 관심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나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저작이나 화제작들 중 해외 저작 상당수의 미번역 상태에 놓여 있다. 히스의 이 책이 읽힌다면 그것은 연구실이지, 지하철이나 버스깐이 아니다.

물론 나같은 사람은 번역이 안되면 원서로라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히스의 이 책처럼 누군가의 노력으로 번역되어 나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번역된 글을 읽으면서 역자가 상당히 애로가 많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히스의 문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한 지젝의 <비딱하게 보기>가 선사한 번역서 읽기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글책 읽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번역서는 많지 않은 법.

꼭 한 번은 읽어보고 싶었던 히스의 이 책을 번역하신 역자와 맹목적 투기(?)의 용기를 낸 출판사에 감사할 뿐이다. 역자의 머릿속에도 있겠지만, 영화 관련 서적 중 아직도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은 줄 알고 있다. 로레티스나 멀비, 메츠의 책도 번역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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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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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방송의 해외 취재 과정에서 벌어진 담당 pd의 비리를 고발하고 자기 스스로 비판한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하다. 법학 전공자이면서도 문학과 회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을 썼을 정도로 그는 심미적 소질의 학자이다. 또 그는 서구적 사대주의에 물든 한국의 풍토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비판 의식을 가진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세상을 타계한 사이드이고 보면 사이드와 그의 주저를 번역한 박홍규 교수가 매스미디어 속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같은 느낌을 준다.

1970년대 후반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이 책이 전세계의 지식계에 끼친 영향은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로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미국 중심의 세계화 편향에 대한 비판과 서구화 일변도의 문화 풍토에 대한 성찰의 도구로서 사이드, 촘스키같은 미국내 반제국주의적 지식인의 저서가 광범위하게 번역, 유통되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심화되어가는 서구와 아랍 사이의 대결 국면은 여중생 사건과 같은 국내적 상황과 맞물려 미국내 반제국주의적 담론은 한국내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논의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사이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에서는 마치 <오리엔탈리즘>이 전공자들이나 봐야 할 책으로 취급되는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사이드의 인생 역정에 있어서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같은 책들이야말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고, 그의 논의가 발전해온 기나긴 여정과 그 결실을 보여주는 핵심 저서인데도 말이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같은 책들은 평범한 독서 패턴으로는 결코 소화하기 힘든 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역자의 해설과 함께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가진 <오리엔탈리즘>(증보판)의 경우, 300페이지 남짓의 포맷을 표준으로 하는 출판 관행과 이에 익숙한 독서 관행으로는 엄청난 부하를 주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익숙한 풍문이나 자기류의 개념 정의에 입각하여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고, 그 역사와 발전 과정,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지적인 관용어처럼 남발하는 풍토가 지배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파’의 과정은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필수적인 과제이다.

사이드의 이 책은 그 엄청난 분량이 말해주듯이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나 지적 영합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페이지마다 그가 제도화된 학문적 범주가 요구하는 지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고심하며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결코 과격하고 과장된 지적 과시주의나 선정주의로 속인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파고드는 것속에서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해명하려는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특히 이 책은 1970년대 ‘중동 사태’라고 불려지는 일련의 혼란 속에서 구상되고 씌어졌다는 점에서 망명 지식인의 정신적 고투가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tv 스크린에 조명되는 투사형 지식인만이 모범적인 지식인의 정형처럼 이해되는 우리 풍토를 되돌아볼 때, 정작 우리 주변에는 사이드형의 지식인이 부족함을 느낀다. 물론 투사형 지식인의 역할을 폄하할 필요는 없으나, 우리의 심성 속에 내재한 폭력과 기만, 위선 등을 해부함으로써 깊은 반성과 모색을 추동하는 사이드형 지식인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의 근대 교육의 결핍된 지점일 것이다. 사이드보다 더 하면 더 했을 격동의 시절을 살아오면서 적당히 보신주의와 기회주의에 영합할 줄 아는 지식인 외에는 키워오지 못한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방대한 구상과 야심뿐만이 아니라, 순응과 타협, 영달의 길 앞에서 자신의 심연 속으로 돌연히 잠입하는 인간적매력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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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창해ABC북 1
마리 엘렌 당페라 외 지음, 신성림 옮김 / 창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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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쿠로사와 아키라의 [꿈]이라는 영화에는 고흐가 등장한다. 프랑스의 어느 한적한 밀밭을 배경으로 태양에 노출된 자연 풍경을 담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한쪽 귀를 자른 상태였으니 아마도 그가 자살하기 얼마 전의 모습일 것이다. 고흐 역을 연기한 마틴 스콜세지의 모습이 고흐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서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고흐는 미술가들 중에서는 가장 세계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떠나 전세계인의 가슴 한 켠에 간직된 예술가의 원형적 인물인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흐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그의 예술의 비밀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그림에 집착했던 열도에서 삶을 대하는 어떤 자세를 배우고자 하는 듯하다.

가난과 냉대 속에서 자기만의 절대를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고흐는 그의 사후에, 그러니까 생전의 그에게는 하등 조금의 삶의 용기도 심어주지 않는 칭찬과 존경을 남겼다. 자기가 죽은 후의 명성이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만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불멸과 절대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그것으로도 예술가에게는 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흐에 관한 책들은 아동용 도서에서 성인용, 그리고 화보나 전기, 허구의 이야기 등 다양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림만으로, 혹은 허구만으로 고흐의 예술적 성취와 관련된 비밀에 다가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호사가의 취미나 아니면 극적인 감동을 기대하는 세인들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가장 풍부하게 고흐의 예술적 성취를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예술적 풍토와 결합되지 않은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조명은 특정 예술가의 성취를 제대로 조명할 수 없다. 바르비종화파나 인상파, 일본 판화와의 연관성, 그리고 고흐가 교류한 화가들과의 상관관계 등 이 책에는 고흐와 관련되어 언급되어야 할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예술가의 병은 창조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작업을 중단할 때, 그의 생명은 끝이 나는 것이다. 고흐의 정신적인 고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는 그가 죽기 전 그린 작품의 숫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예비군훈련을 떠나면서 챙겨 가지고 갔다. 그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까 하다가 고흐를 선택한 것이다. 무릇 삶이 따분하다고 느낄 때면, 항상 나는 화가와 그의 그림을 생각하게 된다. 결코 쉽게 범접하기 힘들지만,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나는 결론 삼아 독서의 결실로 챙기곤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프랑스, 그러니까 고흐가 거닐며 작품을 구상하던 그곳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을 맞으며 고흐를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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