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에는 사람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 온통 기계와 테크놀로지로 분칠한 영화들이 즐비하고, 생활 살이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동적인 영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90년 이후 우리가 훌륭한 영화나 좋은 영화라고 꼽는 영화들의 상당수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은 첨단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다.

누구나 호평하는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내가 그다지 감동하거나 정말 좋은 영화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영화는 모름지기 정서와 감동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고 믿는 비타협적인 신념 때문이다. 너무나 지성적인 영화들이 범람하는 지금, 정말 십년이고 몇 십 년이고 지난 후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아련한 회상에 젖을 수 있는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될까.

지성과 테크놀로지가 물론 인간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문제 삼는 것은 인간성이라 불릴 수 있는 인간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팽창한 각종 영화 인프라 덕택에, 어떤 영화든지 마음만 먹으면 못 볼 영화가 없지만, 최근에 나온 영화들에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다.

30대 이상이면 정영일이라는 영화평론가를 기억할 것이다. 영화 구경이 요즘처럼 다반사가 아니던 시절 매주 주말 밤이면 눈에 힘주며 기다리던 TV 영화를 소개하던 검은 뿔테 안경의 아저씨말이다. 그 아저씨의 영화 소개를 보면서 상영될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그리고 그 영화를 눈에 힘줘가며 봐야할지, 아니면 그냥 킬링 타임용으로 봐야할지 정영일 아저씨는 정확하게 말하곤 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만,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행복했다. 마법과 동화의 세계로 안내하는 마법사 같았다고나 할까.

여하튼 나같은 30대 이상에게 있어 정영일 아저씨는 영화의 원체험을 형성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그 분의 소개로 이후 많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고,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요즘 소개 없이 영화만 보여주는 TV 영화는 너무나 싱겁다. 그리고 최근 영화들 위주의, 그것도 볼 사람은 다 본 영화들 위주의 TV영화는 그다지 볼 마음이 내키지 않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영화가 친숙한 일상의 한쪽을 차지할 정도로 대중화되었지만, 가면 갈수록 예전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자극했던 영화들의 세계에서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제 인간과 인간의 전면적인 부딪침이 아니다. 그보다 얼마나 거대한 예산을 들였는지, 또 얼마나 컴퓨터 그래픽이 뛰어난지가 주요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물론 영화 속에서 반드시 교육적 관심이 중요한 것일 수는 없다. 지친 사람들에게 유쾌한 오락으로서 기능한다면 그것도 영화의 좋은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매개로 세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유행하는 요즘, 우리의 영화 감상이 지극히 최근의 영화들 중심으로 편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과는 달리 TV 영화의 위상이 많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같은 사람은 여전히 신문을 뒤적이며 주말 방영 프로를 점검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공영방송의 TV 영화라면 단순히 시청자의 취향이나 유행에 의존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자세다.

적당한 영화를 보여준다는 식의 발상을 벗어나, 과거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만 머물던 영화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순 방영이 아니라 예전처럼 소개자를 내세워 상영 영화에 대한 정보도 주고 감상 가이드도 적당히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20여 년간 우리의 영화 길라잡이로서 수고하신 정영일 아저씨에게 우리는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때 그분의 모습을 TV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경험들이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훗날 어른이 되어서 기억 속에 간직할 만한 길라잡이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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