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일본영화들을 보다 보면 그 엽기성에 치가 떨린다. <소화가요대전집>이라는 영화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라는데, 소설은 보지 못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영화를 보면 과연 일본영화다운 재기와 엽기의 덩어리이군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일본은 연도를 표기할 때, 우리와 같이 단기를 쓰지 않는다. 소화 15년, 평성 9년처럼 천황의 이름을 먼저 거론한다. 19세기 말엽 단명한 대한제국이 그러했고, 중국이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 중국은 이런 제도를 오래전에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근대화된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여전히 그런 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면, 일본은 이중성, 즉 표면과 이면이 투명하지 않은 나라, 뭔가를 숨기고 있는 나라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일본적인 태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 속 그 어떤 캐릭터를 봐도 그 내면까지를 온전히 꿰뚫어볼 수 없는 무력감을 종종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 역시 연호 사용에 있어서 드러나는 이중성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인물이 그룹화되어 등장한다.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듯한 청년들, 그리고 40대로 추정되는 아줌마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소화 시절에 유행한 가요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중년 여성들이 지나간 가요의 자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갓 스물의 청춘들이 한참 지난 부모 세대의 노래에 빠져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요즘 대학생들이 이미자의 섬마을선생이나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공원같은 노래를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렇게 설정된 청년 캐릭터들의 엽기적인 살인과 방탕한 삶,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신파조 감성이 빚어내는 묘한 아이러니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보이는 엽기발랄함 역시 그렇게 보였다. 아줌마를 폄하하는 가치관에 젖어든 젊은 세대와 그런 가치관에 대해 혁명을 하듯 공격성을 내보이는 아줌마들의 대결은 항상 소화가요가 가진 삶에 대한 우수의 감정과 엉겨서 기묘한 통합을 이루어낸다. 뚜렷한 메시지나 안정된 구조보다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부조화가 줄 수 있는 매력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다. 그것이 류의 발랄함과 엽기성에서 비롯된 것일 지는 모르지만, 그런 시도가 어떤 묵직한 울림보다도 기발함에 더 기대고, 그런 쪽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영화가 더 깊은 감성의 영역으로 뻗어가지 못하는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의 영상문화산업 전체를 놓고 볼 때, 헐리우드나 충무로가 만들어내는 컨텐츠 이상으로 소재상으로 풍부하고 기획도 참신하기는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본적인 것이 큰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장점을 깊이 밀고 나갈 수 있는 정신이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영화의 대부로 불려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소재가 항상 동일하다. 결혼을 놓고 아버지와 딸이 벌이는 갈등, 그리고 부모와 자식 세대의 화해와 같은 매우 소박한 것들이다. 일본 영화계가 그를 일본영화의 원형질을 형성한 위대한 감독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전후 모두가 패배했다고 느꼈을 때, 그 패배로부터 도약할 힘이 가족간의 사랑임을 매우 진솔하게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즈 영화의 단골 배우로서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은 류 치슈의 모습은 일본적인 것, 아버지적인 것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선을 통해 사랑을 보증받고 그 힘으로 새로운 일본을 만들었을 것이다. 일본적인 아버지상의 창출, 그것이야말로 오즈 영화의 힘이고, 사람들이 낡아버린 고고학적 유산이 아닌 항상 돌려보고 이야기하는 영화로서 오즈 영화의 위치를 확보하게 한 힘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영화는 단순함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연출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영화속에는 서구적인 촬영 테크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즈는 인위적인 구도보다는 기존의 공간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기 일쑤이다. 흔히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오즈적 연출법은 인물들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장면은 최대한 길게 유지하면서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나 행동에 최대한 관심을 유지하도록 한다. 현란한 촬영이 주종을 이루고 1초가 멀다하고 커팅하는 요란한 편집이 난무하는 요즘의 일본 영화가 공해임을 오즈 영화는 느끼게 한다. 오즈 영화는 현재의 일본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의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영화이다. 비록 오즈 영화가 가족주의의 틀안에 갇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요즘의 일본영화들보다 더 많은 미덕과 감동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난 우리 영화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아버지적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적인 것이란 내가 나의 삶을 승인받을 수 있는 원초적인 자리이다. 내가 패배할 때, 바라만 보고 있어도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류 치슈와 같은 뚜렷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일본영화는 한동안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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