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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0
김미경 지음 / 책세상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10여 년 간 여성학, 여성주의,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인식론적 지형도를 급격하게 변화시켜 놓았다. 성과 젠더 사이의 구분 관념조차 미약했던 사회에서 이제 관점 자체가 문제시되는 차원을 넘어 그 대안에 대한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상상력 자체가 화두가 되어 가는 시대로 변했다. 관념의 과잉과 더불어 찾아온 상상력의 빈곤은 현 시기 여성학, 여성주의 실천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일상에 대한 분석은 이제 넘쳐흐르는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관념이 우리 일상에서 어떤 변화로 이어질 지를 짚어 내는 능력은 부족하다. 이것은 아마도 이론과 관념의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난점일 수도 있다. 여성주의가 근대성의 중요한 문제라 할 때 그 패러다임은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전도라는 이율배반의 위험성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런 위험성을 깨닫고 경계하는 데 있어 창조적 서사가 가능한 여성 작가의 소설에 희망을 걸어볼만도 하지만, 우리의 여성 작가들은 아쉽게도 사회학적 여성주의와는 희미한 관련성만을 가지고 있거나 오히려 그와는 역행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는 지난 10여 년 간의 여성주의가 사회 곳곳에 전파해 온 성별 구분 관념에 대한 전복,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 한 여성학자의 담론이다. 저자는 한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듯하나 독일 유학 이후 페미니스트가 되어 돌아왔다. 유독 유토피아 서사가 강한 독일에서의 유학 때문인지 저자는 유토피아 서사에 대한 욕망을 따라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 과정에는 유학을 전후한 자신의 변화, 그리고 독일 유학 시절의 경험들, 그리고 귀국 후의 한국 현실 등이 그 예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는 성별 구분 관념의 혁파, 성별 구분 관념이 없는 자유로운 노동 사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남녀 관계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유토피아를 꿈꿀 줄 아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이제 여성이 여성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버릴 것, 그리고 사회적 강자로 군림하는 남성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여성과 연대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제안들 모두는 이미 친숙한 것이지만 재삼 읽고 반성하고 내면화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실제 자신의 현실을 둘러싼 억압의 실체를 파악하고 일상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의 유토피아 서사는 여전히 현실의 질곡과 불투명 앞에서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 점은 이 책의 제목과의 낙차를 생각하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징후로 봐야 할 것이다. 저자의 한계는 우리 모두의 한계이며, 우리 각자의 비전이 모아질 때 우리는 한층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그리고 힘을 가진 유토피아 서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희망을 말하는 에른스트 블로흐와 폭풍 앞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선 천사 그 자신인 발터 벤야민, 이 둘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밑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