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
에르네스트 르낭 지음, 신행선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분량이 어정쩡해서 책으로 출판되기가 힘든 글이 있다. 단행본 분량으로 글을 써내고 고치고 하는 요즘 풍토에서는 그런 어정쩡한 글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편이지만 서양 고전 중에는 한 권으로는 어림도 없이 길거나 짧은 글이 있다. 지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글이 독서 대중에게 제공되어야 하겠지만, 300페이지 내외로 틀이 제한된 출판 상황에서는 짧지만 비중 있는 글을 접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책세상'의 문고판은 훌륭한 포맷이라고 생각된다. 분량이 맞지 않으니 출판할 수 없다가 아니라 출판할 수 있도록 포맷을 만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일 듯하다.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글에 해설을 덧붙인 아주 얇은 책이다. 민족담론치고는 고전적인 성격의 글에 속하는 <민족주의란 무엇인가>(논문)의 핵심은 민족은 인종, 언어, 역사, 지리와 같은 요소가 아니라 함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지, 희망에 따라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 반유대주의가 지배적인 정서로 굳어가던 당대의 상황에서는 진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는데,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오히려 표제로 등장한 글이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라는 글이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와중에 발표한 이 글은 프랑스 지식인의 독일에 대한 동경,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 인종주의가 유럽의 장래에 끼칠 영향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다. 후자는 결국 양차 대전과 그 와중의 아우슈비츠 학살로 현실화, 물질화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잠재되어 있을 인종주의적 성향이 다. 내 경우 동남 아시아인들만 보더라도 '열등함'을 무의식중에 떠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인종적인 편견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열등함과 겹쳐지는 편견일 텐데, 비단 나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성향이 어떤 현실적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든다. 르낭은 반면교사로서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

이 문고판 시리즈의 장점은 부록으로 '더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학술 서적의 참고문헌이 저자의 기계적인 작업임에 반해 '더 읽어야 할 책들'은 독자의 지적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자상한 해설까지 덧붙이는 생동적인 작업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지적 욕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고본들이 지금보다 더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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