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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페미니즘의 고전 중 하나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이번 학기 수업 과제로 내가 제시한 책들 중 하나다. 각 분야로 나눠 3권의 책을 지정하고 그 중 한 권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제인데, 공대생들이라 이 책을 많이 선택할 것같지는 않다. 공대생들 중에도 의외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종종 보아온 터라 그런 의외성을 기대하는 구석도 있긴 하다. 나 역시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나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애들과 함께 책들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영국의 여대 강연 원고를 기초로 다듬어진 이 글에서 가장 명확하게 들어오는 메시지는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해설자는 이런 메시지만 읽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굳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 메시지 때문에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는 당대의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다. 요즘을 살아가는 남자에게도, 그냥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고,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방은 소중하다. 최근의 내 생활에 비추어봐도 이런 메시지는 현실 정합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상황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이 책의 중요성, 그리고 당대적 맥락에서의 이 메시지의 중요성을 놓친다면 굳이 울프의 책까지 읽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울프의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이런 메시지의 발화 주체와 청자가 글쓰기를 희망하거나 거기에 관심을 가진 젊고 지적인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의 재산권, 교육권, 투표권 등 인간의 기본권의 역사가 미약하고 독자적인 사유를 펼쳐나갈 안정된 공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창의적인 활동이 글쓰기로 제한되어 있는 여성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제인 오스틴마저도 안정된 공간을 갖지 못한 채 글을 썼다는 울프의 얘기는 당대의 글쓰기가 여성에게 그렇게 녹녹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돈과 방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여성의 글쓰기의 비전은 울프의 이 책에서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여성문학의 전통이 부재한 현실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관계망을 갖는 존재로 그려져야 하며,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낼 독자적인 문체와 방법을 가져야 하며, 여성성이라는 자의식에 갇히지 않고 양성성에 자신을 열어놓을 때 훌륭한 글쓰기가 가능하리라는 울프의 주장에는 지금도 그 유효성이 다하지 않는, 아니 최근 우리 맥락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논점이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글쓰기에 나서고 있다. 비단 문단에 이름을 걸고 하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던지는 무수한 글쓰기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글쓰기 중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글쓰기도 있다. 여성이라는 자의식에 갇혀 그 주변만을 맴도는 자폐적인 글쓰기, 그것은 가장 소극적인 글쓰기에 속한다. 글쓰기는 자폐를 넘어선 드넓은 세상과의 소통을 욕망하는 안타까움과 절실함의 기호이다. 그러나 채 그런 가능성마저 닫아버린 채 자신의 언저리만 맴도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하강의 고통을 줄뿐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최후의 용기로 나아가는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