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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ㅣ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평점 :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기 시작한 게 한 달 가까이 전의 일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흥미 때문이든 잡스럽다는 편견 때문이든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며칠 내에 끝장을 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보통과는 달리 이 소설을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린 이유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이유로 돌리기는 꺼림칙하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일을 하면서도 이런 저런 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부문에서 1, 2위를 다툰다는 찬사와는 달리 중간 부분을 읽는 게 꽤 지루했다. 아내와 말다툼한 남자가 어느 날 밤 이름도 모르고 얼굴조차 희미한 여인과 쏘다니다가 때마침 발생한 아내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결국에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는 초반의 희한하고 급박한 상황과는 달리 형사 버지스, 남자의 친구 롬버드가 난국을 헤쳐 가는 맥락이 쉬이 잡히지 않는 중간 부분은 지루했다. 그러나 결국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이 성가신 중간 부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추리소설이 매 페이지마다 서스펜스와 추리의 묘미를 주는 것은 아닌 셈이다. 추리소설의 영화 버전인 필름 느와르에서도 형사나 탐정은 의미가 모호한 수 없이 많은 장면들에 등장하고 그 장면들은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한 줄로 꿰어지기 마련 아니던가.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사건의 맥락을 종합하는 쪽은 역시 추리소설답게 형사 버지스인데, 이 사람은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채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가고, 헨더슨의 친구 롬버드가 친구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환상의 여인을 찾아 나선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버지스는 이 사건의 전반적인 얼개와 부수적인 사건들의 의미를 충실히 설명함으로써 모든 의혹은 해결된다. 중간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답답하고 암울해져 조급증까지 느낀 독자로서는 다행으로 느껴지지만, 이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신경이 온통 그 환상의 여인에 기울어져 사건의 전반적인 얼개를 채 분석하지도 못한 채 작가의 발걸음만 좇아 다녔기 때문이다. 남자인 탓일까?
필름느와르에서 여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여자는 미스터리의 근원이자 환상의 근원으로 위치한다. 이 미스터리를 풀어서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 무엇으로 돌려놓는 쪽은 항상 남자이다. 비논리가 엄정한 논리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쾌락, 그것이 추리소설의 매력이다. 세상에는 이성의 엄정한 개입으로 해명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그 자명성에 대한 확신을 동반한 미스터리에 대한 도전은 가장 지적인 게임의 일종이다. 이는 추리소설의 작가들과 그 독자들의 지적 수준과 일치하는 현상이다. 대체로 유명한 작가들은 명문대 출신이 많고, 추리소설의 독자들 중에도 꽤 지적인 사람들이 많다. 독일의 문예이론가이자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추리소설의 사회사인 <즐거운 살인>의 저자 에르네스트 만델, 본격소설의 필명과는 다른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는 소설가들 등은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