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요
디담.브장 지음 / 교양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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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소개되는 걸 보고 그 영화를 다 봤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나, 여기 있어요>란 제목의 이 만화는 한 웹툰 작가가 가부장적 환경 하에서 성장하면서 그 탈출구로 웹툰계에 입문하면서 겪은 성폭력 체험을 자전적 형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책에는 내 경험과 오버랩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또, 나 자신도 나 자신이지만, 내가 일상적으로 지켜보게 되는 대학원생들의 경험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대학원생들이 많이 보시면 좋겠다.)

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즈음, “본 만화는 자살,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나온다.

웹툰계 입문하기 전 가정생활 이야기부터 묘사된다. 주인공은 현지. 그는 가정에서 몇 대 독자인 오빠가 전적으로 군림하고, 딸인 자신은 철저히 소외되는 경험을 한다.

오빠를 전적으로 떠받드는 구조 속에서 오빠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빠 본인은 분노조절장애라고 하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엄마와 현지의 몫이었다. 삼촌한테 성폭력을 당해도 가족과 친척들은 쉬쉬할 뿐, 현지의 피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지는 여성 쉼터로 탈출을 시도했다. 경찰을 찾았지만 경찰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때, 웹툰 작가 문하생 지영의 제안으로 ’정한섭’ 문하로 들어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현지는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제식 교육의 전통이 기존 만화계뿐만 아니라 웹툰계에도 잔존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도제식이라면 우리가 익히 상상하듯이, 스승은 절대 갑이고, 그 문하생들은 절대 을의 위치가 될 것임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비극은 구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승(?) 정한섭의 문하에 들어가 생활한 1년 간 현지는 지속적으로 성희롱, 성폭력, 폭행을 당했다. 20대 초반 사회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하나의 사회로 경험한 정한섭 문하 생활은 현지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이게 사회생활인가 싶게.

안마를 해준답시고 수시로 어깨를 만질 때마다, 현지는 불쾌한 티라도 내면 정한섭이 작업 내내 신경질을 내니까 그게 싫어서 참고 또 참았다. 갑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을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래서 을은 참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이고.

정한섭은 여성 작가들을 “시집도 가고 만화나 그리는 인간들”이라 했고, “순정만화는 수준 떨어져서 못 본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말한 “순정 만화”는 장르가 아니라 여성 작가가 그리는 만화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정한섭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성희롱을 한다. 화실 동료 지영이 밥을 먹다가 반찬을 떨어뜨리면, 지영이 가슴이 절벽이라 바로 떨어지는 거라고 정한섭은 농담(?)한다. 그러면 지영은 따라 웃는다. 현지도 웃는다. 그런데 지영과 현지의 웃음은 정한섭의 웃음과는 다른 것이다. 제3자가 보면 모두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현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정한섭은 “영혼이 없”는 “쓰레기”라 했다. 폭언이다. 대학원생이 써온 논문을 보고 그런 식의 폭언을 하는 분들이 없지 않았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정한섭은 현지의 노동을 착취했다. 현지는 일주일 내내 화실에 출근해야 하고, 청소며 밥차리기는 기본이다. 물론 무급이다. 만화를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언제 만화를 가르쳐주는 거냐고 물으면 알아서 보고 배우라는 식이다. 외식을 해도 더치페이다. 외주 물량을 현지에게 그리게 하고 쥐꼬리만큼 보상을 해준다. 150장 그리게 하고서 10만원.

지영과 현지는 항상 정한섭에게 당하면서도 서로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공유했다. 내가 볼 때 누가 누구를 도울 처지가 아니다. 둘 다 무력한 을들일 뿐.

피해는 계속된다.

쇠, 자, 빗자루로 몇 십대씩 맞는다.

야동을 같이 보자고 한다. 아내가 어디가 있다며 집에 가서 같이 자고 같이 출근하자고 한다. 그리고 “쓰리썸”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쓰레기' 정한섭이 대외적으론 아주 잘 나간다. 업계에서 어엿한 직책이 있다. “쓰레기”같은 “너 같은 애들”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란 말로 자신의 위력을 과시한다. 그럴 듯한 상도 받고, 해외로 알려지고 언론도 조명해준다. 업계 평판도 좋다.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신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엄마에게 미안해서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버텨야 돼”를 되뇔 뿐.

그런데 옆 화실 친구와 대화 중 그가 “너희가 말하는 그거... 범죄 아니야?”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현지는 변곡점에 서게 된다. 그때 느낌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신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던 현지는 정한섭의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용서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는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 후 현지는 화실을 뛰쳐나왔다.

고소를 하려고 경찰서를 찾고 조사를 받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었다. 고소감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 고소를 하려면 일시와 장소를 특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현지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같이 있었던 피해를 특정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 역시 유형적으로 반복되는 일들을 특정하는 건 어렵다.

일시와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던 7건에 대해서만 현지는 고소를 할 수 있었다.

지영도 같이 고소를 하려고 했지만, 반찬 절벽 사건의 경우 같이 웃었다는 이유로 피해자란 사실을 부인당했다.

세상의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전에 웃음의 종류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웃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세상엔 인간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다.

힘 있는 작가도 협회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현지와 지영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터넷에 올리기로 한다. 왜 나랑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업계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그럴 리 없다는 식이다.

시간이 너무 지나 증거가 없었던 지영의 건은 무혐의 처분이 났고, 현지의 건은 경찰 조사가 진행되었다.

정한섭은 경찰 조사에서 모든 가해를 부인했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이런 식이다. 일단 부인하고 증거가 나오면 다른 식으로 돌려 말하고, 그러다가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오면 마지못해 인정할 뿐.

고소를 진행하면서 작가들과 경찰의 전화들이 시도 때도 없이 오고, 생활고도 심해지고, 스트레스도 커져서 현지는 “하루에도 수십 번 고소한 사실을 후회했다.”

그런데 여성 작가들이 돈을 모아서 전해주고, “사건 이전엔 얼굴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나서주었다.”

결국 정한섭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지는 생각한다.

“작가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성폭력이 노동권 침해 문제임을 알았다면”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았다면”
“성폭력은 사회문제임을 모두가 알았다면”
“2차 피해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업계 내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있었다면”
“피해자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지는 지금 만화를 그리면서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로 일하고 있다. 피해자 상담도 하고 있다. 1년 남짓 동안 50여명의 피해자를 만났다고 한다.

어떤 피해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님, 혹시, 정한섭 사건은 아시나요? 그 사건 피해자들은 업계를 다 떠났대요.”

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저, 여기 있어요.”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2020년 12월 25일”로 돼 있다.

작가님,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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