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거의 일본 서적만 읽은 해도 있었다. 일본어 독해가 가능했을 때, 일본 서적은 새로운 지식의 보물창고같이 느껴졌다. 주로 인문사회 서적을 읽었는데, 가끔은 소설도 읽었다. 그때 꽤 열심히 읽었던 건 요시모토 바나나니 에쿠니 가오리,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는 아니었다. 국내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화차」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였다. 문제작 「화차」 역시 번역본이 버젓이 나와 있음에도 그냥 일본어 원서로 읽었다. 일본어 공부도 할 겸 천천히 읽어가며 ‘음미 독서’란 것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일본어 원서였지만 번역본 수준으로 금방 읽어치웠던 기억이 있다.
그후 한동안은 원서든 번역본이든 미야베 미유키 소설 읽기를 꽤 했던 것같다. 한 열 권을 읽었을 터. 그런데 문제작 몇 편을 읽고 났더니 더는 기대할 게 없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야베 소설 읽기를 접었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갑자기 요즘 미야베 미유키는 무슨 책을 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여전히 제목만으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소설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소설이 아닌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소화사 10대 사건」이란 제목도 인상적이었을뿐더러 또 대담집이라는 포맷도 신선했다. 일본 서적 중에는 이 책처럼 대담집이 꽤 많은 편이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아닌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들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작품의 원 소스 찾기의 일환일 것으로 보이는 현대사에 관한 관심의 저변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이 책을 주문하고 일주일쯤 만에 배송받았다.
표지를 열어 보니 미야베의 상대 대담자는 ‘역사 탐정’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논픽션 작가였다. 한도 가즈토시라고.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대담이 진행된 2015년, 이 양반의 나이가 우리 나이로 85세였다는 것. 역시 일본은 장수 국가이며 노익장의 나라구나란 생각을 했다. 딸 벌의 미야베와 함께 서로 소화 시대의 10대 사건을 선정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화 시대란 표현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서기로 따지면 1926년부터 1989년, 즉 히로히토 일왕의 치세 기간을 뜻한다. 각종 전쟁과 근대화, 도시화와 전후 부흥과 올림픽, 각종 사건으로 얼룩진 일본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해도 될 듯한 시대다.
대담이라고 해도 역사 문외한들의 이야기라서 正史적인 근엄함은 전혀 없고 시시콜콜한 신변사 이야기들도 나온다. 일본 현대사에 대해서 몇 권 읽은 사람이면 여기서 논의되는 10대 사건들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같다. 대부분은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사건들에 할애돼 있고, 가끔 ‘일본 최초의 누드 쇼’나 ‘도쿄 사이타마 어린 소녀 유괴 살인 사건’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어 뭔가 새롭구나 하는 느낌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세상을 보는 미야베의 시선이 날카롭다고 느꼈는데, 막상 이런 대담집에서 본 미야베는 그냥 중년 아줌마같은 평범함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뻘인 상대 대담자의 이야기를 주로 들으면서 맞장구쳐주는 역할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미야베가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작가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처럼 작가가 잘은 몰라도 끊임없이 시선을 넓혀 공부해나간다는 건 좋은 일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