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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일기 ㅣ 책읽는 가족 48
오미경 지음, 최정인 그림 / 푸른책들 / 2005년 7월
평점 :
올해 2학년인 아이는 매일 일기를 쓴다.
하지만 그 일기가 온전히 혼자만 쓰고 반성하는 일기가 아닌 검사 받기 위해 숙제로 쓰는 일기다.
집에서는 엄마가 틀린 글씨 교정을 위해 확인하고,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일기를 쓸 때마다 진실이 아닌 적당한 기준을 정해 놓고 일기를 쓰는 것 같다.
아무리 동생하고 심하게 싸워도 절대로 그 일은 쓰지 않고 엄마한테 혼날 날도 그 이야기는 빠져 있다.
일기는 하루를 정리하고, 자기가 한일을 반성하고, 내일 계획을 세우기 위해 쓴다는 다소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해줘도 아이는 선생님께 보여도 될 만큼의 적당한 이야기만 쓴다.
하기야 초등학교 때 나도 지금의 아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교환일기는 어떨까?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서로 교환해 가며 쓰는 일기.
일기를 보는 주체가 엄마와 선생님에서 친구로 바뀐 것 뿐 누군가는 일기를 보게 되는 상황에서 정말하고 싶은 말, 진실만을 쓸 수 있을 까?
2학년 아이처럼 적당하게 신나고, 항상 행복한 이야기만을 쓰고 싶을 것이다.
세 소녀의 교환일기를 읽으며 다른 사람의 비밀일기를 몰래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이기 위한 일기 속에 숨은 아이들의 비밀일기는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6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지각을 해서 벌로 청소당번이 된 민주, 유나, 강희는 유나의 제안으로 교환일기를 쓰게 된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부잣집 딸에서 아빠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엄마, 아빠와 헤어지게 되는 강희.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동생과 어렵게 살고 있는 소녀 가장 민주.
부잣집 딸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공주처럼 지내는 유나.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속이며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써가기 시작한다.
아빠 부도와 함께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부모에게 버려져 작은 아빠 집에서 살고 있는 강희는 여전히 부잣집 딸의 행복한 모습만을 일기에 적는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다 어느 날 갑자기 천덕꾸러기가 된 강희는 부모에게 반항하듯 시험을 엉망으로 보고, 전자 사전을 사기 위해 사촌동생의 돈을 훔치기도 한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부모에게 돌리며 점점 엇나가기 시작한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한마디 설명도 없이 작은 집에 팽개치고 떠나버린 부모 때문에 절망했을 강희가 저지른 잘못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바다 건너 온 태풍이 나무들을 쓰러뜨릴 때 착한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생각하지 않잖아. 우리에게 나쁜 일이 닥친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라는 민주의 말처럼 태풍에 쓰러지는 나무가 나쁜 나무가 아닌 것처럼 아이들의 행복이 스스로가 아닌 부모에 손에 따라 좌우 되는 데 너무 무책임한 민주의 부모에게 화가 났다.
사촌동생의 돼지 저금통을 훔치고, 그 것도 도둑이 든 것처럼 꾸민 것이라든가 친구가 흘린 돈을 줍고도 돌려주지 않은 것이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강희의 입장되어 본다면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단단한 고치에 갇혀 있던 강희가 누에를 키우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 거짓으로 가득했던 허물을 벗고 나방이 된 듯해 마음이 놓였다.
아빠와 엄마를 차례로 잃고 고모 집에서 살다가 고모 네의 이민으로 동생과 단둘이 살게 된 민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워 더 마음이 짠했다.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건 어른들의 잣대로 아이들을 재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은 나도 아들이 친구를 데려오면 부모가 뭐하는 지 궁금하다.
부모가 있고 없음이 아이들의 선택이 아닌데도 어른들의 마음에 자는 이리저리 바삐 아이들을 재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라면 대부분 저질렀을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반성도 없는 민철이 선생님이야 말로 이 시대 어른의 모습일 것이다.
“엄마, 아빠 발 씻겨드리고 느낌 적어오기. 안마해주기. 가족사진 가져오기 등등” 아이의 숙제 중에 부모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숙제가 있다.
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해야 한다.
열심히 학교를 들락거리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했던 내 행동들이 어쩜 민주같은 아픔 있는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만 생각했던 나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공주님 유나는 어린애 같고 투정이 심하지만 어느새 사춘기로 접어들어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생기게 되고, 교환일기를 써가면서 다른 친구를 이해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현실의 아이들은 대부분 유나의 모습일 것이다.
부모가 부자든 아니든 부모에게는 자식이 공주고 왕자일 테니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공주로 남을 수는 없는 데도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엄마들이 영원한 공주, 왕자로 키우고 있는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유나야 말로 멋지게 고치를 뚫고 나올 것 같다.
이 책은 장마가 한창이던 토요일 오후에 읽었다.
아이들은 친구 집에 놀러가고, 남편은 회사에 나간 사이에 교환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숨길 것도 없고 행복한 아이들을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민주나 강희의 아픈 마음이 전해져 와 몇 번을 울었다.
동생을 위해 간식을 먹을 때마다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는 민주와 그 간식을 맛있게 먹는 민철이를 보며 울었고, 가족 신문을 만드는 남매를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점점 아이다움을 잃어가는 강희를 보면서도 혼자서 첫 생리를 처리하는 강희를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지나 지금보다 훨씬 커버린 아이들에게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방이 되었듯이 부자로 살수는 없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아는 강희와 복지관 선생님처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갈 민주와 다른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예쁜 숙녀로 자랄 유나의 미래가 보이는 듯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리 긴 장마라도 그 끝은 반듯이 있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미래는 표지의 하늘처럼 푸르고 눈부실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